배꼽도 빠지고 눈물도 빠지고

민디 케일링, 넷플릭스 시리즈 [네버 해브 아이 에버]

by 쓰리씀

감탄한 그녀- 민디 케일링

내 꿈은 웃기는 글을 쓰는 거다.
먹먹한 감동을 주거나 눈물을 뽑아내는 글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글에는 별로 관심 없다.
파안대소까지는 아니더라도,
피식하는 실소까지는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비전보드에는
웃느라 고개를 못 드는 여성의 사진이 붙어 있다.
민디 케일링이 그 사진 속 인물이자,
내가 닮고 싶은 유머 스타일,
자기 비하지만 결코 만만해지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각색해 가는 코미디 작가다.


가끔 웃기는 이야기를 하려고 신이 나서 말문을 열었는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아, 이건 안 터질 것 같다, 불길한 예감이 들면

여지없이 썰렁해지는 경험을 하곤 한다.

아무나 ‘웃기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웃기는 사람은 마치 바둑기사 같다.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상대방의 작은 변화나 공기의 흐름까지도 예리하게 캐치하는

높은 감수성과 공감 능력.

민디 케일링이 정확하게 그런 사람인 것 같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비극적이었을 수 있는

이방인으로서의 학창 시절을,

자신을 동정하지 않고도 웃길 수 있는 코미디로 설계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너무나 우연히,

민디 케일링도 비전보드를 사랑한단다.

이거슨 운명.

민디 케일링도 원하는 게 있으면 꼭 비전보드를 만들고,

비전보드에 붙여 놓은 건 신기하게도 모두 이루게 되었다는데

도대체 나랑 뭐가 다른 걸까.

……..


감탄한 이야기-Never Have I ever

내 나이 마흔둘에 틴 로맨스 물에 관심을 가진 건 순전히 민디 케일링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민 2세대(줌파 라히리, 가즈오 이시구로에 이은)의

학창 시절을 모티프로 하는 자전적 스토리라고 하니

단순 시청자의 팬심이라기보다

연구자의 자세로 매 에피소드를 습득했다.

게다가 주인공 소녀는 너드다.

너드를 향한 나의 사랑은,

덕후를 덕질하는 나의 순애보는

숨길래야 숨겨지지가 않는 길티 플레져다.


그리고 인도계 여고생의 속마음을 읽어주는 나레이터가

테니스의 전설, 백인 할아버지 존 맥켄로라는 기가 막힌 설정은

해브 네버 아이 에버를 더욱 민디 케일링스럽게 만들어줬다.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 인도계 이민자, 유색인종이자, 여성이자, 미성년자의 목소리를

그 누구도 쉽게 흘려보내지 않을, 백인이자, 성인이자, 남성의 목소리로 대변한다는 것.

거기다 존 맥캔로는, 캐롤 드웩의 책 <마인드셋>에서

고정 마인드셋의 최악의 사례로 수차례 등장하는 오만방자의 끝판왕급 인물이다.

그런 그를 대변인으로 세운 민디 케일링의 영리함과,

그런 모험에 기꺼이 가담한 존 맥켄로의 포용력.


그리고 무엇보다 공동 크리에이터 랭 피셔와의 협업은

내가 늘 동경하고 감탄해마지 않는-

함께 창작하고, 동반 성장하며, 시기하지 않는 우정을 나누는

여성 파트너십의 표본이었다.

프로와 프로가 만나 끝내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희열은 어떨지.

함께 일 하는 과정 자체가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다가 눈물을 쏙 빠지는 일이라면

그리고 그걸 본 사람들이 똑같이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러준다면

더 바랄 게 없는 삶일 것 같다


감탄한 장면

사실 [Never Have I Ever] 시리즈는
남자친구를 만들고 싶어 하는 너드 소녀의
좌충우돌 성장기가 아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마주하지 못하는 소녀가
슬픔을 직면하는 대신,
학교 인기 짱과 사귀겠다는
사소한 목표에 집착하는 이야기다.

그러는 동안 슬픔은 해소되지 않고,
엉뚱하게 튕겨져 나온다.

웃기다가, 슬프고
짠하면서, 대견하다.


결국 시즌 3에 이르러서는
주인공 데비의 16살 썸남 등장 씬에
애를 셋이나 낳은 내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생기고 예쁘고 몸짱인 데다,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기에는 너무 쿨한 인기 짱들이
종국에는 너드가 세운 회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된다는 이야기.

그건 나에게

어떤 권선징악보다 짜릿하다.
지금 내가 이렇게 힘없이 목소리도 없이 살고 있어도
언젠가는 세상을 데굴데굴 굴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고나 할까.


(함께 쓰는) 감탄노트

일이 곧 나를 정의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어떤 태도로 일을 대하느냐가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는 확신한다.


나는 너무 진지하지 않게 진심을 다하고 싶다.

즐거움도, 심지어 슬픔까지도

배를 잡고 깔깔깔 웃을 수 있는 이야기로 바꿀 수 있는

깊이와 영리함,

그리고 내 삶을 희극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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