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 <침묵하는 소수>
감탄한 그녀
시오노 나나미는 정규 역사 교육 한 번 받지 않고, 독학만으로 로마 고대사를 15권 분량으로 집대성했다.
이 문장 하나 만으로도 그녀의 레벨 마스터급 덕후력을 인증한다.
이름도 기본 12 단어부터 시작하는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투리누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같은 인물들의 역사를
혼자 현장을 방문하고, 유적지를 답사하고, 도서관에서 자료를 읽으면서
체화하고 재현한다는 건,
어떤 열정에 얼마나 사로잡혀야 가능한 일일까.
이성적인 논리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으니,
필시 낭만적인 사연이 분명하다.
도대체 이탈리아에는 뭐가 있는 걸까?
이탈리아어로 자아를 재조립 한 줌파 라히리
삶을 다시 “맛보고” 싶어 이탈리아로 갔다는 엘리자베스 길버트,
르네상스 예술에 반해 들렀다가 결국 주저앉아버린 시오노 나나미.
왜 하필, 나의 형님들과 형님의 형님들은 이탈리아에서 다시 살고, 다시 쓰고, 다시 사랑했을까.
고대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감각적인 나라다,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나라다..
같은 뜬구름 잡지식 말고,
“아 이래서였구나!”라는 모먼트를
나도 이탈리아에서 꼭 한 번은 느껴보고 싶다.
그때를 만나면 형님들에게 진심으로 공감하고 감탄할 거다.
혼토니, 센세이
감탄한 이야기 - 엄마와 시오노 나나미
몇 해 전 ‘거실 공부법’이 유행하면서
거실을 서재로 만드는 인테리어가 트렌드가 되었지만,
우리 집은 이미 1990년대부터 모든 책장이 거실로 나와 있었다.
이제 여든이 다 되어가는 우리 엄마,
지금 돌이켜보니 트렌드 세터였구나.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엄마의 책장 컬렉션 중 하나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였다.
엄마는 시저를 이야기를 하며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를 묘사하기에
듣는 동안 심기가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늘 1권과 2권 자리가 비어 있었던 것도.
엄마도 나처럼,
좋은 걸 혼자 좋아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 타입이었나 보다.
늘 집 밖을 나가 헤메고 다니던 그 1권과 2권은
결국 내 차지가 되었다.
결혼하고 나서 친정에 쉬러 갔다가
“엄마 이제 안 읽지?” 하고 두 권을 빼어오며,
엄마 나이가 되면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 책장에 옮겨놓고, 일부러 읽지 않았다.
아직은 이르다고
아직은 멀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미래는 이제 겨우 3년밖에 남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범접할 수 없는 큰 어른의 느낌이었는데,
생각보다 어렸구나.
엄마도, 엄마가 처음인 젊은 엄마였구나.
완전 무결해 보였던 엄마도
지금의 나차럼 불안하고, 때로는 버겁고
수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워가고 있는 중이었겠구나.
그런 젊은 엄마의 디오게네스급 덕후력은 나를 시오노 나나미로 이끌었다.
감탄한 장면
어린 시절부터도 여성서사를 특히 좋아했던 나는
<로마인 이야기>가 아닌, <르네상스의 여인들>로 시오노 나나미에 입문했다.
역사에 길이 길이 남은 르네상스를 이끈 남성 주인공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아닌,
가장자리에서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히 자신의 삶을 살았을 여성들의 이야기에
넘치는 서사와 감탄을 입힌 시오노의 시선을 처음 마주했다.
그리고 그 감동은 자연스럽게 <침묵하는 소수>로 이어졌다.
공식 기록에도 없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아주 재미있지 않은 개인적인 에피소드들을 모아 놓은
이 책을 그냥 읽을 때는 무심한 회고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도
"...이러한 일생을 산 그에 대한 기록은 교황청의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로부터 이틀 후 수도원의 구석진 방에서 그는 홀로 죽었다."
와 같은 부분들이다.
하지만 그 인물과 이야기를 파고드는 시오노 나나미의 열정,
그리고 그녀가 그 자료들을 마주했을 때 느꼈을 흥분과 쾌감을 상상하며 읽으면
역사 속에서 별일 없었던 무명인의 삶이 뜨거운 존재의 증거로 다가온다.
유적지에서 눈을 감고 시간을 흡수하려는 모습,
혹은 늦은 밤 도서관,
잘못 넘기면 찢어져버릴 것 같은 낡은 고서를 조심조심 넘기며,
혼자 무릎을 치며 웃다가도
코를 훌쩍이며 울다가
코를 박고 읽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모르는 그녀.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이들의 삶에
가장 먼저 감탄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기를 쓰고, 그 감탄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의 모습이다.
함께 쓰는 감탄 노트
화려한 중심이 아닌,
말 없는 가장자리에 애정을 기울이는 마음.
나에게도 아주 작은 낭만은 싹트고 있었으나,
아직은, 그저 좋아서 저절로 흘러넘치는
열정의 세계엔 다다르지 못했다.
줄줄 새어 나오는 즐거움이란,
사랑이 아니라 낭만에 빠졌을 때 가능한 감정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