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벨 아옌데, <모든 삶이 기적이다>
감탄한 그녀
나는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한다.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데,
그냥 예쁜 여자 말고
깜짝 놀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아름다운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줌파 라히리도 책 표지에 등판한 미모에 깜짝 놀랐는데,
그 먼저에는 <영혼의 집> 표지의 이사벨 아옌데가 있었다.
살바도르 아옌데를 외삼촌으로 두었다는 가문의 배경보다는 프리다 칼로를 연상시키는, 사물을 꿰뚫어 보는 듯한 대담한 눈빛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하는 덕후력으로
그녀가 TED 강연을 여러 번 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드러난 입담은 필력 못지않게 매혹적이었다.
“노인이 되지 않는 비결은 바른 자세와 불평하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라는 말은
내 삶의 지표가 되었고, 결국 필라테스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밝고 재치 있는 그녀가
장성한 딸을 잃은 아픔이 있다는 사실은 차마 믿기 어려웠다.
[모든 삶이 기적이다]라는 책이
그녀가 스물여덟 살의 딸, 파울라를 잃고 그 아이에게 편지를 쓰듯 삶의 시간을 이어가는 크고 작은 기록이었다.
딸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마치 함께 살고 있는 것처럼 아옌데는 크고 작은 일상을 딸과 공유하며 스스로를 치유해 간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서른 즈음이었다.
나와 우리 엄마 나이대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는지,
눈물을 또르르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엉엉 오열하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감탄한 장면
결혼을 하기 전에도, 아이를 낳기 훨씬 전에도 나는 자식을 잃는 상실에 유난히 감정이 크게 흔들렸다.
이미 겪어서 아는 것도 아니고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을 곁에 두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 특정 이야기 앞에서는 늘 마음이 무너졌다.
어떻게 딛고 일어설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모든 삶이 기적이다>를 처음 읽은 지 10년이 지나고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은 지금,
나는 책을 다시 펼쳐 그 감정을 짐작해 보려 했다.
책에서 아옌데는 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슬픔을 이겨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지려고 했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곁에 딸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닫고
사무치는 슬픔과 그리움에 항복하기도 하지만
중반쯤부터는 일상을 다잡아가고,
현실적인 문제에 골몰하기도 한다.
점차 그녀 특유의 유머감각을 조금씩 회복해 가는 과정에서는
안도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이런 장면이다.
아옌데가 남편 위예와 주얼리 디자이너 친구인 타브라와 인도 여행을 갔는데,
남편이 도착하자마자 장염에 걸리고 만다.
가벼운 병이었지만 며칠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고, 병증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하지만 아옌데는 병이 낫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으며 예정된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친구를 따라 주얼리 원석 세공 작업장도 구경하고,
사고 싶었던 액세서리와 사리도 사러 재단사의 거리도 다녀왔다.
그러다 사흘째 되던 날, 그녀는 이렇게 쓴다:
“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저절로 낫는 병과 놔두면 죽는 병. 밤이 되자 타브라는 위예가 죽으면 우리 여행을 망칠 거라고 귀띔해 주었다.”
절절한 슬픔 속에서 이렇게 가벼운 농담을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특히 그것이 죽음에 관련된 농담이라 반가우면서도 더 애잔하게 다가왔다.
감탄한 이야기
그래, 그렇게 살아지는 거겠지.
나를 숨 막히게 했던 슬픔의 정체는 아마 이것이었을 것이다.
영영 끝난 것 앞에서 여전히 사랑해야 하는 일.
그리고 그리워하느라 남은 인생이 아무 의미 없어지는 두려움.
요즘은 여든에 접어드시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아이를 낳는 일이 어쩌면 부모님과 서서히 멀어지기 위한 준비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부모님과의 예정된 이별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날이 오면 나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고독하게, 남은 인생을 원망하며 살아가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부모님을 발견한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대에 올라 춤을 추는 첫째의 모습은 영락없는 나의 외할머니다.
혼자 놀이터에 나갔을 때도, 첫째의 친구에게 다가가 손깍지를 끼며
“언니 나는 하윤이 언니 동생, 서윤이야”라고 말하는 둘째의 성격은
아이 친할아버지의 피가 분명하다.
주변머리 없는 우리 부부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성격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의 아이들의 아이들에게도 나의 모습이 남아있겠지.
그러니까 영영 잃을까 두려워하기 전에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는 게 좋겠다.
오늘도.
내일도.
함께 쓰는 감탄노트
학창 시절에 엄마가 부엌일을 하면서 발바닥이 아프다는 말을 많이 하셨닼
그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요즘은 나도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발바닥이 그렇게 쑤실 수가 없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흡수된
가치관, 취향, 말투는 물론,
통증까지도 닮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세월의 야속함 마저 닮아간다는 건
사라지지 않는다는 위안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