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판에도 봄은 오는가-사라진 나를 다시 쓰는 일

넷플릭스 시리즈 <The Maid>, 알렉스

by 쓰리씀

1. 감탄한 그녀

넷플릭스 시리즈 <The Maid>의 주인공 알렉스에게 가장 먼저 감탄한 것은,

사실 그녀의 말간 얼굴이었다.
화장기 없는 깨끗한 피부, 소녀처럼 땋아 내린 풍성한 머리.

그리고 무엇보다

비참할 때 비참한 표정을 짓지 않고,
차라리 당황한 얼굴을 짓는 그 품위 있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극 중 알렉스의 삶은 참혹했다.

스무 살, 아이를 원치 않았던 남자친구와의 임신을 시작으로,
아이 아빠의 분노와 정신적 폭력,

교묘하게 그녀를 무능력하게 만들고 고립시키는 가스라이팅을 견디다 못해
결국 어린 딸을 안고 무작정 도망을 가지만

정작 갈 곳도 없고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다.


메이드로 남의 집 청소 일을 하며,

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삶을 이어간다.

혼자였다면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극한 정성과 보호가 필요한 어린 딸과 함께하는 지독한 생활고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립감과 두려움을 동반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알렉스는 딸 앞에서

무기력하거나 초라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집을 청소하러 다닐 때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하임(HAIM)의 I’m in it.

내 처지, 앞 뒤 상황 따위는 잊고,

그저 눈앞의 먼지에 몰두하여, 골몰히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한동안 청소할 때 노동요로 틀어놓았다.

알렉스처럼 절박하지는 않아도,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은 일상의 노동도

일종의 의식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2. 감탄한 이야기

<The Maid>는 단순한 가족 폭력 피해자의 생존기가 아니다.

절망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 존엄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다.


무작정 탈출한 알렉스가 딸과 함께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 지원을 받으려면

‘취업 상태’여야 하는 조건을 갖춰야 했다.

당장 일을 시작해야만 했던 그녀는 메이드가 되어

낯선 사람들의 집 안 구석구석을 닦고

함부로 남긴 생활 흔적들을 하나하나 치운다.

그녀는 매일,

누군가의 쓰레기를 마주하고

누군가의 비밀을 드려다 본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숨기고 싶은지-

그 사소한 흔적들 속에 삶이 담겨 있다.

알렉스는 점점 아무도 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러면서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게 된다.

글로 쓰는 순간만큼은

시궁창 같은 삶의 순간들도

그저 하나의 이야기가 될 뿐이었다.



3. 감탄한 장면

알렉스는 자기가 청소한 집들을 자기의 이야기로 수집했다.

각각의 집들에 붙인 이름은

그녀가 쓰는 글의 제목이 되고,

그녀가 정리한 서랍,

그녀가 버린 쓰레기들은

모두 글감이 되었다.


그리고, 간신히 지키고 있던 자존심 마저 무너졌던 날,

상황이 가장 최악으로 치닫았던 날에도

알렉스는 집에 돌아와

잠도 자지 않고 정신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카메라가 글의 내용을 담지는 않았지만,

분명 자신의 저 깊은 상처를 글에 꾹꾹 담아 옮기고 있었으리라.

그 장면이,

비로소 학대하던 남편에 의해 지워졌던

작가로서의 자아를 완벽하게 되찾는 순간을 보여주는 듯했다.


글을 쓰며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느끼는 것을 정확한 언어로 환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특별한 사람만이 자격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동경해 온 시간들.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빅매직>에서 말했다.
“창작하는 삶을 사는 데 허가서 따위는 필요치 않다. 혹시 그래도 여전히 허가서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전전긍긍한다면, 여기! 내가 방금 당신에게 그 허가서를 내주었다. 예전에 내가 쇼핑할 물건을 적어놓은 낡은 쪽지 뒷면에 방금 쓴 것이다.”


나도 이제는 그렇게 믿는다.
글을 쓴다는 건, 작품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온전히 내 것으로 회복하려는 몸짓일 뿐이라고.


중에 자주 등장하는 알렉스의 노트가 있다.

마블링을 연상시키는 흑백 패턴의 옥스포드 노트.

똑같은 사서, 똑같이 손으로

삶을 내 것으로 고쳐 쓰고 싶었다.


쿠팡으로 최저가 상품을 주문했다가,

글이 써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공책이 달라서 그런 것 같다.

이번에는 공책 뒷면에 작은 글씨로 적혀있는 상품 설명까지 비교해 가며

똑같은 공책으로,

인터파크에서 해외 배송까지 해가며 주문했다.


알렉스의 노트 유사품(좌)와 진품(우)


나는 육아의 한복판에서
내 시간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감정도 희미해지고,
나란 사람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웠던 날들.


그래서 나도 옥스포드 노트에 기록을 시작했다.
매일 새벽,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작은 문장들을 남긴다.

그건 감탄이기 이전에

존재의 확인이었다.



함께 쓰고 싶은 감탄노트

가장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데는,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이야기야말로 가장 먼저 나를 지워버렸던 기억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그 기억의 이름만이라도 적어본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그 문장의 끝에서

나는 다시, 조금,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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