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발바리를 키웠다.
늘 대문 앞에 묶어두고 기르던 개였다.
집은 골목 끝에 있었고,
그 끝엔 우리 식구들만 드나들었다.
그런데도 발바리는
아빠가 퇴근해도 짖었고,
엄마가 시장에서 돌아와도 짖었고,
내가 유치원에서 돌아와도,
삼촌이 담배 피우다 들어와도 짖었다.
늘 짖었다.
어쩌면,
우리 식구들을 매일 새롭게 반기느라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얘가 무섭지 않았다.
달려들고 짖어도,
“우리 집 개”라는 이유 하나로 괜찮았다.
나는 한 번도 발바리를 무서워한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동생 서준이가 엄마랑 병원에 다녀오며
슈퍼 앞 자판기에서 코코아를 하나 뽑았다.
작은 손으로 따끈한 종이컵을 들고
조심조심 걸어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발바리가 달려들어 서준이를 덮쳤다.
코코아는 한 모금도 못 마신 채 바닥에 다 쏟아졌고,
서준이는 엉엉 울었다.
엄마가 나와 “울지 마라, 다시 뽑아줄게” 하며
자판기로 달려갔다.
그리고 며칠 뒤,
이번엔 내가 물렸다.
유치원을 다녀온 날이었던 것 같다.
내가 자꾸 앞에서 장난을 쳤는지,
아니면 반가운 마음에 그런 건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날,
발바리가 내 팔을, 정확히는 손등을 물었다.
피가 났고, 아팠다.
어린 나이에 개한테 물린다는 건 꽤 무서운 일이었고,
피까지 나니 더 놀라서 울었다.
그때 엄마와 할머니가 나왔다.
엄마는 내가 다친 걸 보자마자
말 한마디 없이 짧은 나무 빗자루를 들었다.
그리고는
진짜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채
발바리를 미친 듯이 때렸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냥 조용히,
감정이 사라진 얼굴로
개를 두들겨 팼다.
발바리는 낑낑거리며 뒷걸음질 쳤고,
나는 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슬픈 것도, 무서운 것도, 시원한 것도 아닌
그냥…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후, 엄마는 개털을 잘라왔다.
그걸 태웠다.
불에 그슬린 털을 내 상처에 문지르며 말했다.
“이카면 괜찮다. 낫는다.”
나중에 알게 됐다.
그건 할머니가 시킨 일이었다.
“양밥”이라 불리는 민간요법,
개한테 물리면 그 개의 털을 태워 상처에 바르면
낫는다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미신이었다.
엄마는 젊었고,
할머니는 이미 힘이 많이 빠진 나이였다.
그래서 발바리를 때리는 것도,
털을 잘라 태우고 상처에 문지르는 것도
엄마가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의 엄마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감정 없이,
말없이,
자식을 다치게 한 것에
반사적으로 반응했던 그 얼굴.
그게 엄마의 사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의 본능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혼이 났던 발바리는
다음 날이면 또 나에게 달려들었다.
여전히 짖고, 여전히 반겼다.
겁을 내지도 않았고,
엄마를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웃긴 건,
나도 그 개에게 물렸으면서도
발바리를 여전히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저 “우리 집 개니까”
그 이유 하나로 괜찮았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꽤 또렷하게 남아 있다.
엄마가 나를 지키려 했던 무표정한 보호본능,
친구 같던 발바리가 말없이 맞던 순간의 묘한 애잔함,
그리고 손녀가 걱정돼
‘양밥’이라며 민간요법을 알려준 할머니까지.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건
그 시절,
우리가 가진 방식대로
사랑을 표현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