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구에서, 자동차 정비를 업으로 삼고 살아가던 장남의 딸로 태어났다.
그 남자는 아내를 참 많이 사랑하는 남자였고,
딸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딸은 예쁘게 키워야 하고,
여자는 보호받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아빠의 공주였고,
동생은 그늘 속에서 더 강해져야만 했다.
어릴 적, 무슨 일이든 생기면
나는 늘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밖에서 길을 잃으면,
동생에게 울면서 맞으면,
심지어 기쁜 일이 생겨도
아빠에게 알리고 싶었다.
아빠는 내 첫 번째 청중이었고,
마지막 구세주였다.
우리 외갓집은 걸어서 10분 거리.
사촌 오빠, 사촌 여동생, 우리 남매—
우린 네 명이 한 형제 같았다.
놀고, 먹고, 자고, 웃고,
하루는 우리 집에서, 하루는 외갓집에서.
주말이면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외갓집에서 자는 걸 유독 싫어했다.
“어디 여자애가 남의 집에서 외박을 하냐.”
한결같이 그 말이었다.
근데 1997년 가을,
인디언 썸머의 따뜻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그날만큼은 달랐다.
“그래, 오늘은 허락해 준다. 근데 다음부턴 안 돼.”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그 밤, 외갓집에서 사촌들과 함께 잤고
다음 날엔 강아지를 데리고 집 근처 공원에 다녀왔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 믿었던 평범한 아침이었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전화를 받고 나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하셨다.
“아이고 다은아, 어떡하노… 아이고 아이고…”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다은아. 아빠 다쳤단다. 얼른 집에 가 있그라.”
나는 겁에 질린 채 집으로 뛰었다.
10분 거리가 평생 같았다.
집에는 엄마는 없고, 작은 숙모가 있었다.
아빠는 배만 다쳤다고 했다.
그 말이 거짓말처럼 들렸다.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공기가 꺼져 있는 것 같았고,
시간은 비틀려 있었다.
그러다
큰삼촌과 엄마가 큰삼촌의 차를 타고 돌아왔다.
“다은아, 서준이랑 같이 차 타자.”
동생, 나.
우리 둘이 조용히 차에 탔다.
그리고 삼촌이 울면서 말했다.
“다은아, 서준아… 아버지… 돌아가셨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글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귀도 먹먹했고,
차 안은 낯선 행성 같았다.
아빠의 장례식은,
시간이 아니라 안개 같았다.
지나간 게 아니라 스며든 거였다.
장지로 향하는 날,
아빠를 태운 상여차가 잠시 집 앞에 섰다.
집을 한 바퀴 돌고 가야 한다며,
그렇게들 말했다.
마지막으로 아빠가 살았던 집,
마지막으로 숨 쉬던 공간이었다.
그때 엄마가
아빠가 입던 옷들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마대자루에 담았다.
한복, 양복, 속옷까지.
장지에 가서 태워야 한다는 말에
그렇게 바리바리 챙겼다.
그런데 마지막에,
엄마가 안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부부가 함께 덮고 자던
그 두툼한 이불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 이불을 마대자루 위에 조심스럽게 얹으며
갑자기 무너졌다.
“김준하… 춥다…
준하야, 이불 덮어야 된다.
춥다니까…
우리 이불 덮고 자야지…
같이 자야지…”
그 말은
이불보다도 더 따뜻한 사람의 말이었고,
이불보다도 더 무거운 사랑이었다.
나는 그날,
그 이불이 타는 걸 보지 못했다.
엄마의 그 말을,
그 표정을,
그 울음을
평생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게 아빠와의 이별이었다.
그게 엄마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게
그날 내가 본,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오랫동안 ‘만약’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몇 주쯤 지났을까,
뉴스에서 ‘에어백’이라는 걸 소개하고 있었다.
자동차 안에서 사고가 났을 때,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 사람을 보호하는 장치라고 했다.
어떤 충돌에도 얼굴이 핸들에 닿지 않게 해 준다고 했다.
생명을 지켜주는, 새로운 기술이라고 말했다.
나는 TV 화면을 멍하니 보다가
숨이 턱 막혔다.
“그게… 그게 아빠 차에만 있었으면…”
“딱 그때, 그 차에만 있었으면…”
그랬다면
아빠는 갈비뼈가 심장을 찌르는 일 없이
살아남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 생각만 하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런 날이 많았다.
억울하고, 분하고,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 화살을
아빠 옆에 탔던 친척 아재에게로 돌렸다.
어린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왜 우리 아빠가 죽고,
그 아재는 살았지?”
“왜 하필 우리 아빠가 핸들을 잡았던 거야?”
“그 아재가 대신 죽을 수도 있었잖아.”
… 그때는 그게 죄책감인지도 몰랐다.
그저 내가 너무 어렸고,
너무 아팠고,
아무도 그 감정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빠 옆자리에 있던 그 아재의 아들.
그 아이는 나와 같은 반이었다.
우리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그 애 이름도 서준이었다.
우리 동생도 서준이었기에,
친척들은 그 아이를 ‘큰 서준이’,
우리 동생을 ‘작은 서준이’라 불렀다.
그 집안은 촌수로는 꽤 멀었지만,
그 집 아들이 나와 동갑이었고,
이름은 우리 동생과 똑같아서
괜히 더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학교에 가서 그 아이와 마주칠 때마다
말을 걸지도, 피하지도 못했다.
그 애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눈물이 나지도 않았고,
미안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복잡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말없는 감정들이
내 안에서 자꾸만 엉켜 있었다.
근데 그때,
큰 서준이는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 아빠가 그렇게 다쳤는데도,
나에게 어떤 원망도, 묘한 눈빛도 없었다.
늘 똑같은 모습으로 대해줬다.
그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고마웠다.
우리는 같은 핏줄을 가진 친척이었고,
명절마다 늘 얼굴을 마주치는 사이였기에
말은 안 해도
서로에 대한 약속 같은 게 있었다.
뭔가,
서로를 챙기고 도와주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굴러갔다.
큰 서준이는,
내가 그렇게 복잡한 생각들에 휘청일 때도
그저 평소처럼 대해줬다.
그리고 엄마는 일찍이 나보다 더 큰 마음으로
이 현실을 껴안고 있었다.
엄마는 말했다.
“그 사람 대신 아빠가 간 게 아이다.
운전은 느그 아빠가 했고,
운명이 그랬던 거지.
누가 대신 살아남은 게 아니고,
그냥… 아빠가 책임을 진기다.
사고라는 게 그런 거다.”
그 말을 듣고,
큰 서준이가 말없이 묵묵히
나를 대하던 행동들을 떠올리고 나서야
나는 그 아재를 미워했던 내 마음도
천천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아재는 이후로
엄마만 보면 늘 고개를 못 들었다.
자기 때문에 동생이 죽은 것 같다고,
자기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게 너무 죄스럽다고.
나는 지금도 그걸 기억한다.
그 죄책감의 얼굴,
그 무거운 눈빛.
그리고 내 어린 마음에 남았던
그 수많은 “만약”이라는 그림자들도.
이제는 안다.
그 누구도,
그 누구도
대신 죽을 수도, 대신 살아남을 수도 없다는 걸.
그건 그냥
그날의 우연,
그날의 비극,
그날의 운명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