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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미는 어떻게 세계를 전시했나

근대 디자인사 #2. 수정궁과 만국박람회

by 공일공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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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런던 하이드 파크. 거대한 수정궁이 솟아오르고, 인류는 처음으로 ‘산업’이라는 이름의 만국박람회를 맞이한다.


✍ “한 지붕 아래 세계 전체를 보여주어라”

1849년 겨울, 런던의 잡지들은 한 가지 소문으로 들끓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이 “세계 모든 산업·예술품을 한곳에 모으겠다”고 선언한 것. 불가능해 보이는 이 계획의 해결사는 뜻밖에도 온실을 설계하던 정원사였다.

조지프 팩스턴 – 식물원 유리 온실의 모듈 구조를 응용해, ‘가장 가볍고, 가장 빠르게 지을 수 있는’ 거대한 철·유리 궁전을 제안.

9개월 만에 완공된 투명 건축 The Crystal Palace – 그 안에 들어갈 전시물은 곧 19세기 산업문명 그 자체였다.




1. 유리·철골·볼트 ― ‘기계미’가 건축이 되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빛의 대성당"

두께 1cm 남짓의 유리 패널 29만 장이 빚은 전례 없는 투명성

28a9df47322e7.png clu / DigitalVision Vectors via Getty Images


"물과 공기의 집"

기둥 대신 주철, 벽 대신 유리를 사용한 '해골형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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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비가 내린다"

증기기관을 식히는 기계 열기로 인한 실내 기후 변화


→ 이 건축은 모듈·규격·프리패브(prefab) 개념을 최초로 대중에 각인시켰다.
→ 건축은 더 이상 돌과 벽돌만의 예술이 아니다. 산업 공정 그 자체가 미(美)의 조건이 되었다.



2. ‘전시’라는 발명 ― 세계가 한눈에 배열되다


6만m² 유리 지붕 아래 모인 것은 예술품만이 아니었다.

영국관 – 증기기관차, 코일 방적기, 워털루 전투 디오라마

프랑스관 – 고급 실크와 사보아 도자, 사르데냐 크리스털

인도·중국관 – 자수 텍스타일, 자개 반닫이, 종교 목판화

미국관 – 새뮤얼 콜트의 리볼버 권총, 아이작 싱어의 재봉틀


634e6352d01da.png Heritage Images/Getty Images
c4ef735cfb686.png Heritage Images/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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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곧, 기술이 만든 ‘새로운 세계지도’다.”
– The Illustrated London News, 1851


관람객 600만 명은 인류 최초의 글로벌 상품 스펙터클을 체험했다. 전시회장은 시장·박물관·극장을 한몸에 담은 새로운 도시였다.




3. ‘기계의 아름다움’ vs. ‘기계의 공포’


찬미

“철과 유리는 인간 이성을 구현한 선(善)이다.” – The Times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처럼 투명하다.”


비판

“값싼 장식과 기계적 모방이 진정한 미를 파괴한다.” – 존 러스킨
“대량생산품은 영혼 없는 껍데기다.”


이 극단의 온도 차는 미술공예운동·아르누보 등 차세대 디자인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Crystal Palace는 “기계 시대의 승리 아크”이자 “기계를 경계하는 윤리적 질문”을 던진 현장이었다.




4. 남겨진 유산 ― ‘디자인 시스템’의 태동


| 박물관 & 학교

전시 수익으로 사우스 켄싱턴 박물관(현 V&A) 설립
헨리 콜의 ‘산업·예술·교육 삼위일체’ 모델 → 후일 Royal College of Art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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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 엑스포의 시작
파리(1855)·필라델피아(1876)·시카고(1893)… 국가 브랜드 경쟁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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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탈로그 문화
기업들은 초기 ‘브랜드 룩북’인 상품 카탈로그를 제작 → 그래픽 디자인·타이포그래피 급진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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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궁전, 투명하지 않은 질문


Crystal Palace는 1936년 화재로 사라졌지만, 던진 질문은 여전하다.


“기술은 어떤 미를 만들고, 어떤 미를 파괴하는가?”
“디자인은 그 사이에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1851년의 유리 궁전은 21세기 메타버스·AI 전시관으로 모습만 바꿨을 뿐,

기계가 만든 스펙터클 너머에, 인간을 위한 시선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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