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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HD 해부기록] 나는 극복 대신 껍데기를 택했다

by 엔트로피


나는 긴 글을 못 읽는다.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못 하는 거다.

노골적으로 슬픈 현실이지만, 나는 슬픔 같은 정직하고 단순한 단일 감정은 숨을 곳이 없어서 내 뇌가 감당 못 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껍데기 쓰고, 겁나 웃긴 상태로 글을 쓰고 있다.



어느 날, 큰마음 먹고 껍데기를 벗겨내고 회피 없이 감정을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네가 예민한 거 아니야?”

짜증나지만, 정답!

그 어떤 사람은 핵심을 찔렀다.

나의 내면은 복잡함과 예민함을 기본 바탕으로 움직인다.



이런 내 기본값에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이나

잘 정리돼 바로 이해되는 감정이 예고 없이 직선으로 들어오면,

나는 껍데기 쓸 시간도 없이

바로 뇌를 관통당하고,

그대로 정지된 채 견디기만 하는 상태가 된다.



이런 나에게 글에서 뿜어나오는 감정은 정말 날카롭다.

영상에 나오는 감정은 배우의 얼굴, 영상미 등 다른 요소와 어우러져

내가 깊게 느낄 새 없이 빠르게 감각으로 흘러들어온다.



하지만 글은 다르다.

다른 요소 없이 감정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더 무겁고,

내 뇌는 그걸 감당 못 해서 튕겨내 버린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극복했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극복 안 하는 걸로 극복했다.

내가 감당 못 하면, 뇌가 알아서 튕겨낸다.

그것조차도

이 복잡하고 예민한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다.

혼돈을 원하는 게 아니었음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글을 못 읽는 건 좀 아쉽긴 한데… 어쩔 수 없지.

애초에 나는 “어려움 극복! 감동 실화!” 캐릭터랑은 안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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