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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HD 해부기록] 질서에서 해방되는 날

by 엔트로피

휴일은 나에게 “질서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이 날이 오면 나는 이렇게 다짐한다.

“계획, 준비, 맥락 전부 삭제! 뇌는 반쯤만 켤게요~”

그러고는 혼돈을 꺼내 입는다.

이게 바로 나의 휴식 시간이다
그걸 이해하려면 먼저, 평일의 나부터 봐야 한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땐,
나는 전날부터 내가 예측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무한으로 돌린다.
억지로 계획표를 짜고,
입을 옷도 짜증 섞인 의무감으로 다려놓는다.

이걸 본 사람들은 말한다.

“와, 너 진짜 부지런하다.”


하지만 그건 그냥,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생계형 질서 모드일 뿐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굶어 죽지 않으려고 현실 맞춤형 질서를 억지로 유지 중이다.

에너지는 방전을 넘어
내부가 썩어간다.



그러다 휴일이 온다.

이 날, 나는 신나서 다짐한다

“그 무엇이든 대충 해야지”

무계획. 무검색. 무맥락.
스마트폰은 그냥 손에 들고만 있는 장식품.
버스 정류장은 늘 반대편.
운 좋게 버스를 타더라도,
음악에 빠져 흥얼거리다 목적지를 지나친다.

남들이 볼 땐 그냥 대혼란이지만,
내 입장에선 딱 맞는 흐름이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말한다.

“이건 그냥 산책이야♡”


그리고 그날의 서사를

나만의 콘텐츠로 만든 다음,
조용히 뇌에 저장한다.

뇌의 초점이 흐려져
혼돈의 사건들이 연달아 터져도,
나는 나를 항상 지켜본다.

덕분에 에피소드는 계속 생성된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바로 “돌발 현상”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영화를 보던 중,
갑자기 “나 핫케이크를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생각이 꽂힌다.

그건 그냥 스치는 생각이 아니다.
마치 신탁처럼 뇌에 박히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로 각인된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아주 공격적으로 홀린 듯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집에 와서 진짜로 핫케이크를 만든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휴일은 항상 무계획으로 시작된 하루였지만,
지금 보면 이건 완벽한 서사다.

정리는 안 되지만,
기억에는 잊히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끝은 아직 없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도
다음 에피소드를 쓰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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