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대신 찍은 건 무엇이었을까
서울명문고시원 2층 끝방 204호.
문을 열자 곰팡내가 먼저 몸에 달라붙었다. 빈곤이 스며든 벽지는 군데군데 갈라져 흘러내렸고, 테이프로 붙인 전단지가 벽지의 멱살을 간신히 붙잡고 덜렁거렸다. 낡은 형광등은 간헐적으로 깜빡이며 위태한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불에서도 오래도록 쌓인 눅눅함이 배어 나왔다.
책상 위에는 원고지가 몇 장 흩어져 있었다.
종이컵에는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가 반쯤 남은 채 까맣게 식어 있었다.
수연은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에는 편의점에서 계산대를 지켰고, 지금은 병원에 들러야 했다. 늘 잠이 부족했고, 늘 돈이 모자랐다. 글을 쓰겠다는 꿈은 여전히 마음속에 있었지만, 하루는 늘 피곤에 쫓겨 손에 쥘 새도 없이 흘러갔다.
병원 복도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했다.
텔레비전 드라마 대사, 환자들의 기침, 간호사 구두소리와 환자 모니터 알람이 뒤섞여 복잡한 소리를 냈다.
문을 열자 아버지가 몸을 일으켜 허리를 굽혔다.
“선생님, 고생 많으십니다.”
딸을 못 알아보고, 병원 관계자에게 하듯 깍듯이 인사하는 얼굴.
수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수건을 데워 아버지 얼굴을 닦으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거친 손이 그녀의 손목을 막았다.
“이런 건... 제가 해도 됩니다.”
갈라지는 목소리가 병실 바닥에 흩어졌다. 단단한 고집도 함께.
아버지의 몸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중풍으로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거의 쓰지 못했다. 밥을 먹을 때면 숟가락을 제대로 잡지 못해 국은 흘러내리고, 밥알은 옷 위로 곤두박질 쳤다. 수연이 숟가락을 들어 도와주려 하면, 그는 손사래질과 함께 “내가 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곧 손이 떨려 다시 밥을 흘렸다.
“여기... 우리 집 맞지?”
“아버지, 여긴 병원이에요.”
“아, 그러냐? 근데 저 방에 네 엄마 있니?”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를 찾았다. 수연은 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해봐야 곧 잊을 게 뻔했으니까.
잠시 후 그는 수연을 간호사로 착각했다.
“간호사 양반, 오늘도 고생 많소.
내가 우리 딸 얘기를 해줬던가? 아주 공부를 잘하거든.
기똥차게 잘한다고.”
수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바로 앞에 있는데요.”라는 말은 목구멍에서만 맴돌다 삼켜졌다.
인슐린 주사 시간이 다가오자 간호사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주삿바늘을 보는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싫어!!! 오늘은 안 맞아! 괜찮다니까!”
몸을 비틀며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기 시작했다. 울먹이고, 침대 난간을 두드리며 버텼다.
결국 간호사 둘이 붙잡은 후에야 겨우 주사가 놓였다. 바늘이 들어가는 순간, 그는 “죽여라, 그냥 죽여라” 하고 울부짖었다. 수연은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그 울음에 답할 여력이 없었다.
며칠 전부터는 같은 병실을 쓰고 있는 다른 환자들의 과일이 자꾸 사라졌다. 귤이나 사과가 없어졌다는 말에 다른 보호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수연은 괜히 아버지 손을 펼쳐보았다. 손톱 밑에는 귤 껍질 즙이 스며든 듯 노란 얼룩이 있었다.
저녁 무렵 병원 문을 나서자 겨울 공기가 수연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신림9동 골목길, 전봇대마다 종량제 봉투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고양이들이 봉투를 찢으며 먹이를 찾았다. ‘달밥, 식권, 아침식사 됩니다’라는 광고지가 빼곡히 붙은 식당들 사이로, 파란색 ‘서울명문고시원’ 간판이 희미한 빛을 뿜어냈다. 그 어설픈 빛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고시원 복도는 늘 비슷했다. 누군가는 라면을 끓이고, 누군가는 세탁기를 돌렸다.
옅은 흐느낌, 알아듣지 못할 중얼거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까지 섞여 좁은 복도를 메웠다.
204호 방에 들어서자, 바깥보다 싸늘한 공기가 다시 몸을 감쌌다.
수연은 책상 앞에 앉아 원고지를 펼쳤다. 펜을 잡았지만, 글자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병실의 냄새, 아버지의 울음, 주삿바늘을 피해 몸부림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치매, 중풍, 그리고 당뇨.
아버지와 수연을 절벽까지 밀어버린 그 이름들과 함께.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벽 너머에서 누군가 크게 웃었고, 또 다른 방에서는 욕설이 터졌다.
그 소리들은 이상하게도 그녀의 빈 종이에 찍히지 않은 마침표처럼 남았다.
오늘도 글은 쓰이지 않았다. 대신, 좁디 좁은 방안 구석에서 머리를 감싸 쥘 뿐이었다.
수연아, 잘 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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