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겠어.
재판장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피고, 원님. 그리고 원고, 팥쥐. 오늘은 혼인빙자간음 건으로 심리를 진행합니다.”
법정 안은 술렁였다. 이 작은 마을의 원님이 피고석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례적인 일이었으니.
사람들은 숨죽여 두 눈을 굴리며 팥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팥쥐는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법정의 공기가 적막에 가깝도록 가라앉았다.
내 이름이 불릴 때마다, 방청석 어디선가 작은 비웃음이 그물처럼 번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못된 언니’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오늘, 그 오명을 벗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았다.
피고석에는 원님, 그의 왼편 맨 앞줄엔 콩쥐가 앉아 있었다. 익숙한 순한 표정. 그리고 젖은 눈가.
판 사: “검사, 모두진술 하십시오.”
검 사: “예,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는 원고에게 혼인을 빙자하여 감언이설과 선물을 건네고,
정조와 명예에 중대한 손해를 입혔습니다. 나아가 같은 시기에 원고의 이복동생과도
혼인 약속을 시사한 정황이 다수 확인됩니다.”
변호사(피고 대리): “이 사건은 과장과 오해의 산물입니다. 잔치 자리에서의 인사말과 폐백용 선물을
‘혼인’으로 확대해석했을 뿐입니다.”
나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판 사: “원고, 그날을 기억하십니까?”
그 집에서 살던 날들을, 잊은 적이 없다.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계모와 팥쥐가 콩쥐를 괴롭혔다는 그 소문, 그건 콩쥐가 흘린 헛소문들이었다.
콩쥐는 아버지의 재혼이 못마땅했고, 큰 재산을 나와 나눠야 한다는 사실이 더 못마땅했던것 같다.
아버지 앞에서는 눈물과 애처로운 몸짓을 하며 소문을 가렸고, 아버지가 문밖을 나서는 순간, 그녀의 눈빛과 독을 품은 입술은 날카로워졌다.
내게 깨진 독에 물을 퍼오라 했다. 독은 밑이 새어 물이 줄줄 흘렀다. 밤마다 진흙탕을 맨발로 걸었고, 손바닥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얼마나 물가를 오고갔는지 셀 수도 없었던 그때, 기진맥진해 독을 붙잡고 주저앉은 내 뒤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꺼비였다. 등에 흙먼지를 묻힌 채, 그 커다란 몸으로 독의 깨진 부분을 눌러 막아주었다.
그날 밤, 나는 겨우 물을 채웠다.
이런 학대에 가까운 황당한 일들은 끊임없이 나의 심장과 뇌를 갉아먹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게 참고 살다 보면, 나에게도 좋은 날이 올 거라 믿었다.
적어도 ‘가족’이라는 말이, 나를 한 번쯤 품어줄 거라고 믿으려 애썼다.
잔치 소식이 들려온 날, 콩쥐가 말했다.
“언니가 어머니와 먼저 가서 자리 좀 잡아줄래.”
이상했다. 자리? 나와 엄마를 먼저?
그래도 갔다.
등불이 줄지어 매달린 마당에 도착하자, 원님이 나를 불렀다.
“수고 많았소.”
그는 내 손을 가볍게 덮고,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은장식이 달린 비녀, 화려한 노리개 몇점, 새초롬한 빛의 옥반지, 연회 초대장을 닮은 카드.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오. 내 마음을 잊지 마시오.”
그 말은 달콤했으며, 또 부드러웠다.
내 귀에는 ‘혼인’으로 들렸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눈길이 내게 머문다고 믿고 싶었다.
뒤늦게 나타난 콩쥐는 눈물 한 방울을 얹은 미소로 날카롭게 말을 골랐다.
“원님, 언니는 성정이 사나워 사람을 다치게도 합니다. 아버지가 계실 땐 숨기지만요.”
원님의 눈빛은 잠시 흔들렸지만, 잡은 손은 그대로였다.
그렇게 그날 밤은 원님과 함께였다.
잔치날 화려하게 마당을 수놓은 전등들은 나를 위한 축복같았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나에게도, 콩쥐에게도 ‘약속’을 흘렸다. 그 사실은 오래도록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며칠 뒤, 마을에 혼례 소식이 퍼졌다. 신부의 이름은 콩쥐였다.
나는 그렇게 나의 마음이 짓밟혔던 그 날을 기억한다.
판 사: “증거조사에 들어가겠습니다. 검사 측, 제출할 증거 있습니까?”
검 사: “예, 증거물 제1호, ‘항아리 파편’입니다. 갈라진 옹기 조각과 당시 수선 흔적.
원고가 대부 분의 허드렛일을 떠맡았다는 정황을 보강합니다.”
법정서기가 상자를 열자, 흙내가 번졌다.
검 사: “증거물 제2호, ‘증언서’ 두 통. 마을 부녀회·이웃의 진술입니다.
아버지가 집을 비울 때마다 콩쥐가 원고에게 폭언·가혹행위를 했다는 내용, 그리고 아버지 앞에서는 피해자인 척 연기했다는 내용입니다.”
변 호 사: “이의 있습니다. 전언(傳言)에 불과한, 신빙성 낮은 문서입니다.”
판 사: “채택 여부는 종합심증으로 판단하겠습니다. 받아두죠.”
검 사: “증거물 제3호, ‘비녀 상자’. 잔칫날 피고가 원고에게 건넨 선물 일체입니다.
상자 안쪽에 피고의 봉인과 서명이 남아 있습니다.”
변 호 사: “예의와 덕담이지, 혼인 서약이 아닙니다.”
검 사: “증거물 제4호, ‘서신’. 피고의 친필.”
서기가 봉투를 열어 검사에게 건넸다.
검 사: "‘잊지 마시오. 곧 좋은 소식을 전하리다. 내 마음을 받아주오.’ 라고 적힌
피고의 친필이 있습니다. 또한 피고의 도장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판 사: "피고 신문 하겠습니다. 피고, 일어나세요"
원님이 천천히 일어섰다.
검 사: “잔칫날 원고에게 선물을 주며 ‘곧 좋은 소식’을 말했다는 사실, 인정합니까?”
원 님: “덕담이오. 체면을 세우기 위해 미사여구를 사용한 것 뿐.
선물 역시 단순히 잔치에 방문한 자들에게 건네는 답례품일 뿐입니다.”
검 사: “같은 날, 콩쥐에게도 ‘혼인을 이야기’한 사실은?”
원 님: “흠...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않소? 게다가 고작 한마디 말에 혼인약속이라 믿는
저 계집이 더 이상한 것 아니오? 나는 그저 그것이 우습기만 하오”
검 사: “혼인 의사표시를 남발해 두 사람 모두에게 기대를 심어준 행위, 그 자체가 기망입니다.
또한 피고는 원고를 꾀어내 정절을 취했기에 이 행위 또한 혼인을 빙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변 호 사: “이의 있습니다. 원고의 믿음은 주관적 추정입니다. 공식 혼인서약이나 증표는 없습니다.
꽃신은 콩쥐의 발에 맞았고, 혼인은 적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검 사: “그러나 피고는 그 과정에서 ‘원고도 아내가 될 것’이라는 뉘앙스를 수차례 흘렸고,
선물을 건네며 ‘내 마음을 잊지 말라’고 서면까지 남겼습니다.
동시에 원고에 관한 악담을 들으며 이를 방치했습니다. 이중 약속의 전형입니다.”
나는 그를 보았다. 그가 나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만 또렷했다.
콩쥐는 고개를 숙여 눈물 한 방울을 짜냈다.
판 사: “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팥 쥐: “저는 바보였고, 순진했습니다. 저는 그날의 말과 상자 하나를 ‘사랑’이라 믿었습니다.
판사님... 저는 계속 견뎠습니다.
가족의 말과 마을의 소문이 제 살갗을 베어도, 버텼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이름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못난 언니’ 말고, 제 이름으로.”
팥 쥐: "원님은 제게 "이 고을의 반려가 될 사람, 바로 여기 있소"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어찌 거짓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원님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원님에게 저의 순결을 드렸습니다."
법정은 조용해졌다. 판사가 판결문을 넘겼다.
판 사: “선고합니다. 피고 원님은 원고 팥쥐에게 혼인을 빙자하여 감언이설과 선물,
반복된 이중 의사표시로 정조와 명예에 중대한 손해를 입혔습니다.
이에따라 피고를 징역 3년 2개월에 처한다.”
탕, 탕, 탕!!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누군가는 고개를 젓고, 누군가는 조용히 박수를 쳤다.
나는 눈을 감았다. 승리의 환호가 아니라, 멍울 하나쯤이 조금 풀리는 소리였다.
밖으로 나오는 길, 늦은 바람이 흙냄새를 데려왔다.
사람들은 앞으로도 나를 못난 언니라 부를지 모른다. 상관없다. 기록은 남았으니까.
나는 오늘, 내 이름으로 말했고, 내 이름으로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없는 때마다 벌어졌던 일에 대해 밝혀지지 않았던 것들, 콩쥐가 뿌린 소문과 학대, 그리고 혼인을 무산시키기 위해 쌓아올린 밑밥과 악담들.
나는 그 모든 손해에 대하여, 콩쥐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내 이야기는 오늘로 끝났다.
아니, 이제야 시작되었다.
※ 본 글에 등장하는 법률적 표현과 재판 절차는 실제와 무관한 순수 창작물입니다.
실제 재판과는 다르더라도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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