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를 다 먹어버렸다 1

by 김소희

우리가 녹색으로 이어져있었을 때. 나는 빨간 토마토만 먹었어. 꼭지는 톡 따버린 채 딱딱한 껍질을 씹어 울컥 터지는 과육을 씹어 먹었어. 너와 나의 초록은 매우 진하고 깊었지만 나는 그리 쉽게 떼어내 버리고 말았어. 위에서부터 올라오는 산미를 음미하며 우리의 떫음을 회상했지. 풀 맛. 푸르른 맛. 편안한 맛. 그걸 버린 거야. 나만이 줄 수 있다던 신선함은 쉽게 시들고 너에게 받은 초록은 영원할 듯이 싱싱했지. 윤오야, 토마토는 다 먹어버렸어. 이제 꼭지만 남았는데, 차고 넘치는 초록색 꼭지들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고 있어. 내게 손을 뻗는 모양인 작은 꼭지들이 말라버릴 때까지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아주 말라버려 갈색의 향기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카페 직원이던 윤오를 보고 눈길을 떼지 못해 낯선 말을 걸어버린 날에 우린 산책을 했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길. 공원 둘레에 짧은 잡초들이 자란 길만 골라 걸었다. 주변엔 나무가 있었고 하늘은 이미 해가 져 어둑했다. 온전히 까맣지도 않은 서울의 밤. 우린 나란히, 앞을 보고 걸었다. 따뜻한 색을 좋아해요. 할 말이 떨어져 겨우 내민 질문에 윤오가 답했다. 저도 초록을 좋아해요. 내심 기뻐 말을 받았다. 저는 불에서 볼 수 있는 색들을 좋아해요. 그런 따뜻한 색. 정안 씨의 따뜻함은 초록인가 보네요. 초록은 안심의 색이었다. 누군들 안심을 따뜻하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윤오는 타인에게서 아름다운 것만 골라내는 재주가 있었다. 우리의 관계가 이어지면서 나도 그의 재주를 닮고 싶다는 바람에 사로잡혔다. 정안 씨는 참 따뜻한 사람이에요. 윤오 씨는 참 따뜻한 사람이에요. 우리의 따뜻함은 다른 색이었지만, 다른 온도의 색이었지만, 서로를 아름다워하기에 연결되었다.


윤오에게 가는 사다리는 탄탄하고 높았다. 저 하늘 끝까지 뻗어있는 사다리 끝에 그가 있을지, 중간에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를 터였다.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내게 다채롭다고 말해주던 사람. 정작 자신은 사계절 빛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 우리 양배추를 먹자. 우리 깻잎을 먹자. 유난히 초록 음식을 좋아하던 윤오는 정작 초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열정적이고 싶어, 이유도 단순한 빨강을 향한 열망.


침대에 누워 함께 떠들다 보면 윤오의 얼굴은 조명에 반사돼 주황색이 되었다. 윤오가 원하던 색깔. 그러나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는 푸른 사람이었으니까. 나의 삶을 단정하게 엮어줄 덩굴 같은 사람. 조명에 비친 내 얼굴을 윤오는 쓰다듬었다. 눈이 아름다워. 콧대가 아름다워. 입술이 아름다워. 그러고선 차분한 키스를 해주던 윤오의 순서는 나만이 받을 수 있는 사랑이었다. 내게 주는 사랑이 아름다워 윤오를 사랑했다. 내가 가진 색깔을 아름다워하는 그를 사랑했다. 닮고 싶었지만 전혀 닮을 수가 없던 아름다움을 증오했다. 시들면 볼품없는 낙엽 색깔이 되는 그의 색을 질투했다. 내게 주는 사랑을, 내게만 주는 사랑을 더더 갈망했다. 그럴수록 세상은 아름다웠다. 그는 아름다움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 마음을 나눌 곳이 너무나도 많았다. 오늘은 사랑스러운 연인이 왔어. 서로를 아끼는 게 눈에 보였어. 서로의 취향을 알고, 메뉴판에서 자신 것보다 먼저 골라 주문하던 아름다운 사람들을 봤어. 윤오의 반짝임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비추고 있었다. 초록을 반사해 보색을 더욱 선명하게 보이게 했다. 윤오로 인해 나도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열정적이고 싶다던 윤오의 열망은 내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자주 무기력했다. 자주 누워있었고, 자주 눈물을 흘렸다. 나 때문에 우는 날엔 그의 이파리가 종이 한 장보다 가늘어 볼품없었다. 그런 날이면 나를 꽉 껴안아 질책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나의 잘못임이 분명한 상황에도 그는 늘 질책했다, 자신을. 푸름은 불에 약했다. 타오르는 내 질투와 엇나간 사랑이 그를 태워버린 날이 있었다. 그을린 마음을 잠시 덮어두고 그는 나를 안았다. 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초록은 좋은 연료가 되었기에. 윤오에게서 진득한 빨강을 보기 전까지 우린 이 관계를 지속했다. 흐를 만큼 많은 양의 빨강을 내 눈앞에 들이댔다. 윤오가 나를 보는 색은 그러한 진빨강 색이었다. 끈적하고 쓰라린 아주 아픈 색이었다. 윤오를 안아주기에도 모자란 날에 그냥 집 밖을 나와버렸다. 윤오의 안부는 병원에서 대신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