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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피해 안주고 죽고 싶은 사람을 위한 실무 매뉴얼

죽음이란 행정처리—민폐 제로 완벽 가이드

by 박참치

#T-R-Θ50306-X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죽고 싶은 사람을 위한 실무 매뉴얼


“죽음이란 행정처리—민폐 제로 완벽 가이드”


작성일: 20XX-03-06

저자: 박참치 (생존학, 실존학, 인간한계학 연구자)



서문


“죽음이란, 인생 최후의 자가설계 프로젝트다.”


대부분의 인생 매뉴얼은 살아남는 법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이 문서는 정반대다. 이미 모든 퀘스트를 깼는데 굳이 마을로 돌아가야 할까?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갔는데 스태프랑 악수까지 해야 하나? 죽을 마음은 확실한데, 시청 민원실이 발목을 잡는다면, 이건 마치 파산 신청서 쓰는데 도장 깜박한 수준의 귀찮음이다.


이 문서는 죽음을 권하지 않는다. 대신, 죽음마저 ‘깔끔하게’ 하고 싶은 자들에게 설계도를 준다.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프로젝트를 착수하다 보면, 인생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애증에 찌들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부디 이 글을 읽다가 “아오… 이렇게까지 하느니 그냥 살아야겠다” 라며, 자괴감과 연민 사이에서 웃으며 멈춰 서기를 바란다.



1. 세팅하기


1.1. 무대 고르기 – 절망과 인테리어의 균형 잡기


자살 장소는 너무 아름다워도 안 되고, 너무 처참해도 안 된다

공사장 15층은 분위기는 좋지만, 계단이 너무 많고 관리자에게 피해

호텔방은 깔끔하나 퇴실 시간 압박이 있음

추천: 창밖 풍경이 약간 흐린 오피스텔 고층, 혼자 사는 친구 집 비우는 날 (단, 치워줄 사람 확보 필요)


“주의: 너무 아늑하면 ‘아, 일단 여기서 커피 한잔 해야지’ 하다 못 죽음”



1.2. 날짜 선정 – 죽음에도 분위기는 중요하다


절대 생일이나 기념일은 피할 것. 기억하는 사람은 괴롭고, 잊는 사람은 죄책감도 없음

월요일 오전은 추천하지 않음 → 출근 스트레스와 섞여 존재가 희석됨

금요일 오후 5시 이후 추천: 사람들이 슬퍼할 여유가 있고, 장례식도 주말에 배치 가능


“가족 행사 있는 달, 가정의 달, 명절 전후, 각종 기념일, 뜻깊은 달, 뜻 없는데 괜히 기분 좋은 달, 아이돌 컴백 시즌… 다 빼자. 빼다 보면 남는 건 2월 29일 하루뿐이다. (그마저도 4년에 한 번)”



1.3. 외적 상태 – 마지막은 작품처럼


헤어는 깔끔하되, 너무 정갈하면 계획 티 남

옷은 새 옷 NO / 너무 누더기 NO → “아… 얘 좀 힘들었구나” 정도의 정돈 필요

손톱, 발톱 깎기 필수. 유족이 가장 먼저 보는 건 신체 끝단이다

손톱·발톱 자르기 외에도, 발뒤꿈치 각질 제거 (의외로 시신 처리자들이 먼저 보는 부위)

치과에서 최근 스케일링을 받았는지 확인 (유골 인계 시 유가족 충격 완화)

특정 문신, 자해 흔적 등 민감한 흔적이 있다면 가리는 옷 선택


“마지막 셀카 금지. 클라우드 자동 업로드 된다.”



1.4. 발견자 멘탈 보호 가이드 – 덜 놀래키고 죽기


가족·친구가 발견 시 평생 무료 악몽 구독권 지급

발견자는 가급적 공적 업무 담당자(경비·관리인·택배기사)로 유도 (단, 이분들도 덜 충격적인 건 아님)

현장에 “죄송합니다” 메모 하나 남겨두면, 담당자 마음속 화가 15% 정도 줄어듦

소음·냄새·시각적 충격 최소화하기

일정 시간 연락 없으면 방문하는 체크인 서비스나 위치 공유 설정


“발견자가 ‘준비성 미쳤다’ 할 정도로 설계하여, 마지막 감탄을 이끌어 낼 것”



2. 정리하기


2.1. 유품 정리 - 마무리 청소 가이드


폐기/위임/기부, 세 가지로 분류

유산분배 계획서 작성 → 불필요한 상속분쟁 예방 (통장잔고 17000원? 차라리 치킨 시켜 먹기)

남기면 곤란한 물건은 즉시 폐기 (성인용품, 모텔 영수증 등)

집 상태는 “원래 깔끔했네”와 “이 사람 갑자기 치웠네” 사이의 절묘한 지점 찾기

서류·디지털 파일(암호 포함)은 ‘사후 처리 박스’에 한 번에 모으기

집에 ‘이 사람이 죽은지 며칠 됐는지’를 가늠하게 할 썩는 음식·악취 유발물은 전부 제거

주변 CCTV 영상 저장 기간 확인 → 불필요한 추적 가능성 제거


“침대 밑: 고등학교 때 사놓고도 못 버린 망가짱 피규어, 이제는 보내줄 때다.”



2.2. 디지털 정리 – 온라인 너도 같이 죽어야 한다


중요한 건 전부 USB로 옮기고, 유족이 보면 X되는 건 압축 후 물리 파괴

본인 명의 도메인·웹사이트·서버 호스팅 해지 (SNS, 커뮤니티, 이메일 포함)

클라우드에 쓸데없는 짤 삭제 (하드디스크·클라우드 내 영상, 텍스트, 녹음 파일 모두 점검)

브라우저 기록은 클린업 툴로 깔끔히, 단 ‘지운 흔적’도 남지 않게 설계

“자가오럴 실패”, “죽는 법 아프지 않게” 등의 키워드가 남아있을 경우 가족 울음소리 2배속

가족 단톡방 이름 변경 고려 (예: “우리 집 따수미” → “사후 서비스 종료 안내” 정도)

단톡방 이탈 전 마지막 알리바이 메시지 남기기

은행, 클라우드, 유튜브 기록 등 주요 계정은 유언장에 패스워드 동봉


“죽음보다 더 지우기 어려운 건, 네 브라우저 기록이다.”



2.3. 공과금 정산 및 계약 해지


가스·수도·전기·인터넷·핸드폰: 모두 정산 후 해지 (요금 미납보다 더 찜찜한 건 그 흔적)

자동 갱신되는 구독 해지 (넷플릭스, 클라우드, 게임패스 등)


“핸드폰 요금 미납 시 통신사 비상 연락처(종종 부모님)로 연락 감 → 죽어서도 민폐 가능”



2.4. 행정·법률 후속 처리 최소화


주민등록증·여권·운전면허증 등 신분증류 회수·폐기 (도용 방지)

집 계약이 본인 명의일 경우, 사망 신고 지연 시 체납 처리됨

자동이체 목록 정리 (사망신고보다 빠른 이체 시스템의 위엄)

비트코인 지갑 비밀번호 → 어디에 있는지, 누가 접근 가능한지 지정

사망 보험 유무 확인 및 수령인 지정 재검토 (수익자 변경 시, 보험사 통지 필요)

사망 이후 구청·병원·보험사 서류 최소화 세트 준비


“이 단계에서 의외로 삶이 ‘정리불가능한 것 투성이’임을 인지하게 됨”



3. 영정사진 매뉴얼 – ‘웃는 얼굴로 죽기’ 작전


권장 사양: 3분 이상 거울 보며 표정 연습 후 셀카 → 친구에게 검수 → 출력 및 디지털 원본 USB 저장

비추 샷: 여행지 배경 + 썬글라스 + 브이 / 셀카앱 뷰티 필터 9단계

전 남친/여친이 어깨 짚고 찍은 사진은 자제할 것 (크롭해도 어깨 위 손이 귀신처럼 나옴)

“나답게 나온 사진이 가장 좋다” → “인생에서 가장 괜찮았던 날의 나”를 고르자

군필자는 PX 간 날을 추천한다. (광택과 각이 살아있다.)

민간인은 면접 준비했던 날, 또는 ‘셀카 앨범 속 뜻밖의 우수에 젖은 눈빛’ 발견 시 활용

(※ 유서 쓰고 통장 정리까지 해놓고, 영정사진은 2021년 MT 때 술병 든 얼굴이면 고인의 진정성이 의심받는다.)


“인생의 마지막 프로필 사진을 고르는 순간, 사람은 잠깐 살아 있는 얼굴을 하게 된다.”



4. 최후의 재정


4.1. 장례비 예산 공식


(빈소임대료 + 관·수의비 + 음식값) × 사람 체면 지수

→ 평균값: 700만 원

→ 체면 버리면: 300만 원

→ 빈소도 버리면: 200만 원



4.2. 민폐 최소화 팁


지자체 공영장례 직행: 빈소? 없음. 조문? 없음. 깔끔.

화장 직통 모드: 불 들어가고 2~3시간이면 끝

현금 준비: 최저 200만 원(유골함 예쁜거 하고 싶으면 20만 원 추가)


“죽기 전에 장례비 모아두는 건 의무다.
안 그러면 ‘저승 가서도 카드값 독촉 받는’ 드문 케이스가 될 수 있다.”



5. 최후의 감정 청소


5.1. 유언장 작성


유언장 템플릿을 활용 → 최소한의 법적 형태 유지

“내가 사라진 후에도 너는 계속 살아줘야 해”라는 반사 메시지 남기기


“부록: 유서 템플릿 2종 (감성형 / 실무형)”

※ 유서 템플릿이 필요하신 분은 별도 신청 바란다. 단, 신청과 동시에 박참치 비밀 감시 명단에 등재되며, 이후 귀하의 일정·식단·브라우저 기록이 모니터링된다. (농담이다… 아마도.)



5.2. 타인을 위한 정리


단톡방 퇴장 여부는 신중히 고려 (갑작스레 나가면 의심됨) → 메시지 단절 후 자동 휴면이 자연스러움

편지는 금지 (쓰다 보면 변명처럼 됨) → 그냥 핸드폰 메모장에 비밀번호 걸린 파일로 남기자

가장 덜 중요한 사람(예: 이름 헷갈리는 지인)부터 정리할 것. 중요한 사람은 늘 마음을 바꾸게 한다

“그냥 너랑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정도의 뉘앙스가 가장 효과적임

자주 연락하던 사람에겐 ‘이별 메시지’ 대신 ‘한동안 연락 어렵다’ 한 줄만 남기자


“죽음은 이별이지만, 이별은 죽음을 무르기도 한다.”



5.3. 반려동물 처리 플랜 구체화


실행 전, 안정적으로 입양 완료시키는 게 최선

불가피하면 구조 루트 확보: 유기동물센터와 사전 협의 + 입양처 확정

비상사료&물 1주일치 준비 + 접종·건강기록 동봉

되도록 반려동물부터 먼저 이사 보내라. 반려식물도 마찬가지. 반려돌멩이도…


“그들에게는, ‘버려졌다’는 오해와 ‘주인이 죽었다’는 이해 중
어느 쪽이 더 견디기 쉬운지 미리 결정해줘야 한다.”



5.4. 기타 (의료·해부학적 활용 여부)


장기기증 가능 (자살이어도 OK! 건강 상태 우선 판단)

해부용 시신 기능은 미리 등록되어 있어야 가능 (자살 사망 경우, ‘거의 불가’라는 사실 참고 요망)

시신 인수 조건·위치·운송 여부는 사전 합의 필수


“당신은 누군가의 첫 해부 실습에서, 메스를 든 손을 떨리게 만든 최초의 인간이 될 수 있다.”



6. 마지막 돌아보기 – 계획 후 48시간 재검토 기간 운영


계획 후 48시간은 ‘잠정 보류’ 상태로 지정 → 이 기간 동안은 어떤 실행도 금지

술·담배·게임·연락·SNS·배달 어플 → 전부 차단

이틀간 가만히 누워, 심심함과 배고픔, 화장실 욕구만으로 인간성을 점검

36시간쯤 되면 ‘이 짓을 왜 하나’라는 생각과 함께, 짜장면을 배달시키게 됨

통계상, 귀찮음이 가장 강력한 생존 본능임


“죽음은 계획보다 실행이 어렵고, 삶은 실행보다 계획이 어렵다.”



6.1. 챌린지 1: ‘나 없는 세상 실험’

48시간 동안 모든 연락 차단 + SNS 활동 중지

주변 반응 관찰 후, “나의 부재가 얼마나 민폐인가” 점수화

자기 관찰 노트: “내가 사라졌을 때 불편한 사람 점수표”


6.2. 챌린지 2: ‘사후 정리 시뮬레이션’

감정곡선 그래프: 자살충동 vs 준비 난이도 (← 교차지점에서 대개 포기함)

QR코드 팩 이미지: ‘남기고 가는 자의 디지털 유산 키트’ 형식

죽음 리허설 체크리스트: 도식화 + 표로 가독성 있게



결론: 가장 까다로운 죽음을 설계하다 보면, 대충 사는 삶이 차라리 낫게 느껴진다


죽음을 계획하며 정리하다 보면, 삶이란 얼마나 지저분하게 뒤엉켜 있는지를 알게 된다. 보험, 전기세, 브라우저 기록, 애완동물 사료까지. 삶은 무질서하고, 그래서 인간적이다. 이 매뉴얼은 죽음을 권하지 않는다. 다만 ‘끝까지 깔끔하고 싶다’는 마음이 얼마나 귀찮고도 인간적인지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정리에 진심일수록 오늘 한 번 더 미뤄지곤 한다.


박참치는 말한다:

“죽음은 프로젝트이고, 삶은 디버깅이다. 버그가 아직 많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자살 미수자들에게, 이 문서를 헌정한다.





나는 죽음을 택하지 않았다.

퇴실 절차가 지나치게 복잡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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