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에서 시작된 자유의 언어
나는 가끔 생각한다. 왜 어떤 사회에서는 머리카락 한 올이 법이 되고, 감시가 되고, 처벌의 이유가 되는가. 바람을 맞고 흔들리는 머리카락은 본래 자연의 일부인데, 누군가에겐 그 자연스러움이 죄가 된다. “어느 날, 내 머리카락 때문에 내가 불순해진다면?” 이 질문 자체가 폭력이 되어버린 땅에서, 소녀들은 교실에서 히잡을 벗고 운동장에서 구호를 외쳤다. “여성, 삶, 자유.” 그 세 단어가, 한 시대를 갈랐다.
히잡(Hijab).
아랍어로는 ‘가리다’, ‘덮다’라는 뜻을 지닌 이 단어는 단순히 머리를 덮는 천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천 년의 역사와, 종교적 전통,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논쟁의 상징이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의 머리카락은 오랜 세월 동안 정숙함과 순결, 그리고 종교적 헌신을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꾸란(코란)에서도 여성들이 공적 자리에서 자신의 머리카락과 몸을 가리도록 권고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권고가 현대에 들어와서는 국가적 법과 제도의 형태로 강제되기도 하고, 문화적 규범으로 자리 잡기도 하면서 ‘자유로운 신앙 행위’와 ‘억압적 규제’ 사이의 논란을 낳게 되었다.
히잡이라고 하면 보통 머리와 목을 가리고 얼굴은 드러내는 스카프를 떠올리지만, 사실 이슬람권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히잡(Hijab): 머리와 목을 덮지만 얼굴은 드러낸다. 가장 널리 쓰이는 형태.
니캅(Niqab): 눈만 남기고 얼굴 전체를 가린다.
부르카(Burqa): 온몸을 덮고 눈까지 망사로 가린다.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볼 수 있다.
차도르(Chador): 이란 여성들이 주로 착용하는 전통 의상으로, 얼굴은 드러내지만 머리와 온몸을 천으로 감싼다.
나라별로도 규정은 다르다.
사우디아라비아: 과거에는 공공장소에서 아바야(검은 망토)와 히잡 착용이 법으로 의무화되었지만, 최근 들어 일부 완화되었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집권 이후 다시 여성들의 부르카 착용을 강제하며 국제적 비판을 받고 있다.
이란: 법적으로 여성은 공공장소에서 반드시 히잡을 착용해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도덕 경찰이 단속한다.
터키와 튀니지: 한때 공공기관에서 히잡 착용을 금지했지만, 이후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프랑스: 종교적 중립을 이유로 공립학교와 공공기관에서 히잡 착용을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어, 여전히 논란이 크다.
이렇듯 어떤 나라에서는 신앙의 자유로, 또 다른 나라에서는 억압의 도구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히잡이다.
따라서 히잡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옷차림’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몸과 자유를 누가 결정할 권리를 갖는가라는, 더 본질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란 거리 한복판에서, 그리고 전 세계 여성들의 일상 속에서 뜨겁게 던져지고 있다.
1. 히잡, 무엇인가 ― 신앙과 관습, 그리고 정치
히잡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다.
아랍어 ‘히잡(hijab)’은 본래 ‘가림, 장벽, 차단’을 뜻하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주로 여성의 머리와 목을 가리는 스카프를 지칭하지만, 사실 그 의미와 형태는 지역과 시대마다 달라왔다.
키마르(Khimar) : 머리와 어깨를 덮는 긴 스카프.
질바브(Jilbab) : 온몸을 덮는 긴 겉옷.
차도르(Chador) : 주로 이란 여성들이 착용하는 검은색 전신 베일.
니캅(Niqab) : 눈만 남기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베일.
부르카(Burqa) : 눈까지 망사로 덮는 전신 베일.
즉, 히잡은 단순히 머리만 가리는 천이 아니라,
여성을 사회 속에서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와 연결된 문화적·종교적 장치였다.
꾸란에도 관련 구절이 있다. “믿는 여성들은 가슴을 가리도록 하라”(24:31), “밖에 나갈 때 겉옷으로 몸을 가리라”(33:59).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어떻게 가려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해석은 단정과 겸손의 상징으로, 또 어떤 해석은 엄격한 의무로 이어졌다.
즉, 히잡은 본래 신앙의 상징일 수도 있었지만, 권력이 개입하는 순간 ‘의무’로 바뀌고, ‘강제’로 변질되었다.
2. 이란에서 히잡이 ‘권력’이 되기까지
이란에서 히잡의 의미는 시대마다 완전히 달랐다.
1936년, 팔라비 왕조의 레자 샤는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며 여성들의 베일 착용을 강제로 금지했다. 경찰이 거리에서 여성의 히잡을 벗겨버리는 일도 있었다. 베일을 벗을 자유가 아니라, 벗지 않으면 안 되는 억압이었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히잡은 다시 의무화되었고, 이번에는 반대로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가리지 않으면 체포되거나 처벌받게 되었다.
즉, 이란 여성들은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벗어야만 했던 시기”와 “써야만 하는 시기”를 모두 겪은 것이다.
자유의 문제라기보다, 언제나 권력의 도구로 이용된 셈이다.
그리고 2005년, ‘도덕 경찰’이 등장했다.
그들은 거리와 쇼핑몰, 심지어 카페까지 돌아다니며 여성의 복장을 검열했다.
“히잡이 너무 얇다”, “머리카락이 보인다”, “코트가 몸에 너무 붙는다.”
이런 사소한 이유로 연행과 체벌이 이루어졌다. 여성의 몸은 곧 권력의 얼굴이 되었고, 히잡은 충성심을 보여주는 신분증처럼 변질되었다.
3. 2022년 ― 마흐사 아미니와 소녀들의 봉기
모두가 기억한다.
2022년 9월, 22세의 마흐사(지나) 아미니가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체포되었다. 며칠 후, 그녀는 구금 중 사망했다.
당국은 “지병 때문”이라 했지만, 많은 증언과 조사에서 폭행의 흔적이 드러났다.
그녀의 장례식에서 외쳐진 구호는 곧 전국으로 번졌다.
“여성, 삶, 자유.”
특히 놀라운 건, 시위의 선두에 선 이들이 10대 소녀들이었다는 것이다.
교실에서 히잡을 벗어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운동장에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렸다.
일부는 체포되었고, 일부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장면은 전 세계 언론에 퍼져나갔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의 각성을 불러왔다.
4. 왜 ‘머리카락’인가 ― 몸, 상징, 지배
머리카락은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다.
사회가 규정하는 ‘여성성’과 ‘순종’의 상징이 된다.
머리카락을 가린다 → 순종적이고 정숙한 여성
머리카락이 보인다 → 부도덕하고 불순한 여성
이런 프레임은 단순히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착한 시민/나쁜 시민으로 나누는 도구였다.
그래서 여성들이 머리끈을 풀고, 히잡을 벗는 것은 단순한 행동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권력에 맞선 선언이었다.
“나는 나의 몸을 통제할 권리가 있다.”
작은 머리카락 한 올이 국가의 권력과 충돌하는 지점이 된 것이다.
5. 강요된 히잡이 무너뜨리는 것들
강요된 히잡은 단순히 옷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건강
여름의 뜨거운 날씨에도 온몸을 가리면 체온 조절이 어렵다. 습기와 땀으로 인한 피부질환, 호흡 곤란이 잦다. 특히 학생이나 노동 여성들은 장시간 착용으로 만성 두통과 어지럼증에 시달린다.
존엄
국가가 머리카락 한 올로 범죄 여부를 판별한다면, 여성은 매일 ‘감시받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 자존감은 조금씩 무너지고, 스스로를 죄인처럼 느끼게 된다.
기회
히잡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교 출석이 제한되거나,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경우가 많다. 벌금이나 연행은 경제적 약자에게 더 큰 타격이 된다. 결국 강제 히잡은 빈곤의 악순환까지 만든다.
이처럼 강요된 히잡은 단순한 복장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제약하는 족쇄다.
6. 여성들의 저항과 연대
히잡 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여성들 스스로가 움직였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남성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앞장서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번엔 달랐다.
거리에서 히잡을 불태우고, 머리카락을 자른 여성들.
학교 운동장에서 책상 위에 올라가 구호를 외친 10대 소녀들.
SNS에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며 “나는 더 이상 숨지 않겠다”라고 말한 젊은 여성들.
그 용기 있는 행동은 곧 연대의 불씨가 되었다.
터키, 프랑스, 미국의 여성들도 머리카락을 자르는 영상을 올리며 연대했다.
한국에서도 몇몇 대학생들이 캠퍼스에서 검은 베일을 벗어던지며 퍼포먼스를 했다.
심지어 중동의 다른 나라 여성들조차, 자신들의 상황이 달라서 공개적으로 행동하지는 못했지만, 온라인에서 ‘좋아요’와 댓글로 지지를 보냈다.
이 연대는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동일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 몸을 내가 결정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아픔을 겪고 있다.”
7. 국제사회의 반응
국제사회는 처음에는 관망했다.
하지만 시위가 확산되고 사망자가 늘어나자,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특별 세션을 열어 이란의 인권 침해를 규탄했다.
유럽연합(EU)과 미국은 도덕 경찰에 직접적인 제재를 가했다.
전 세계 수많은 인권 단체들이 연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란 정부는 외세 개입이라며 강경하게 맞섰다. 인터넷을 차단하고, SNS를 봉쇄하며, 더 많은 시위대를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건, 단순히 이란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성의 몸을 권력의 도구로 삼는 행위는 전 세계 어디서나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국제사회의 반응은 단순한 정치적 제재를 넘어, 여성 인권의 보편적 문제로 확장되었다.
8. 왜 이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인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란 여성들의 히잡 시위가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문제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여성들도 여전히 외모 규범에 시달린다. “여자는 화장을 해야 한다”, “결혼식에선 반드시 하얀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 “머리는 길러야 예쁘다” 같은 압박은 여전히 존재한다.
직장에서 여성은 ‘단정하게’라는 이름으로 스커트와 하이힐을 강요받기도 했다.
청소년 시절 교칙에 따라 머리카락 길이, 양말 색, 귀걸이 여부까지 규제받았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즉, 히잡 문제는 결국 “내 몸을 내가 결정할 권리”라는 더 큰 주제와 연결된다.
우리가 이란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 자신의 자유와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9. 자유와 신앙 사이에서
물론 이 문제는 단순히 ‘히잡 = 억압’이라는 공식으로만 볼 수는 없다.
많은 무슬림 여성들은 스스로의 신앙심에 따라 자발적으로 히잡을 선택한다.
그들에게 히잡은 신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신앙의 자유이자 정체성이다.
문제는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벗을 자유가 있는가?
쓰지 않을 자유가 보장되는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신앙의 자유가 아니라 억압이다.
자유와 신앙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 속에서 신앙이 빛나야 진짜 의미가 있다.
누군가의 강요로 쓰는 히잡은 신을 향한 마음이 아니라,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굴레일 뿐이다.
10. 앞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이 문제를 바라보며, 우리는 자주 무력감을 느낀다.
“저 먼 나라의 일인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작은 행동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알아야 한다
우선 알아야 한다. 이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마흐사 아미니가 단순한 뉴스 속 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는 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말해야 한다
SNS에 글을 남기고, 주변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된다. 침묵은 권력의 편에 서는 것과 같다. 작은 목소리라도 모이면 큰 파도가 된다.
-연대해야 한다
국제 인권 단체, 여성 인권 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할 수 있다. 직접적인 참여가 어렵더라도, 그들에게 힘이 되는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우리 사회를 돌아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안의 억압을 돌아봐야 한다. 교복 치마 길이 규제,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외모 강요, 직장에서의 유리천장. 우리 역시 작은 히잡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질문해야 한다.
소녀들의 외침이 남긴 것
히잡은 단순한 천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신앙의 상징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억압의 족쇄였다. 그러나 지금 이란의 거리에서,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히잡을 벗어던진 소녀들에게 그것은 존재를 증명하는 외침이 되었다.
“여성, 삶, 자유.”
짧지만 강렬한 이 구호는 더 이상 이란 여성들만의 외침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연대의 목소리 속에, 그것은 시대의 선언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가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면, 그 순간 또 다른 마흐사 아미니가, 또 다른 이름 없는 소녀가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머리카락 몇 올이 무슨 큰일이냐고 치부했던 사회는, 결국 한 사람의 꿈과 웃음을 앗아가 버린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단순히 억압과 폭력의 역사만이 아니다.
그 속에서도 두려움을 딛고 나와 목소리를 높인 소녀들의 용기, 그리고 그들의 눈빛 속에 담긴 미래다.
히잡을 강제로 씌운 손길은 잠시 사람들을 억누를 수 있을지 몰라도, 자유를 향한 갈망까지 지울 수는 없다.
머리카락을 가리는 것으로 영혼을 가릴 수는 없고, 신체를 억압하는 것으로 인간의 존엄을 꺾을 수는 없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인가?
억압과 침묵의 세상인가, 아니면 자유와 존중이 당연한 세상인가.
그 답은 멀리 있지 않다.
먼 나라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작은 관심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관심은 언젠가 누군가를 구할 첫 번째 손길이 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수많은 소녀들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친구와 웃고 떠들어야 할 나이에, 거리에서 히잡을 벗어던지며
“살고 싶다” 외쳤던 그 눈빛을.
머리카락을 가리느냐, 드러내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권리,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존엄의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멀리서 할 수 있는 일은 크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함께 분노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 딸들이,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억압이 아닌 자유로, 두려움이 아닌 존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지금 우리가 눈을 감지 않는 일에서 비롯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