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추방된 천사들(-영혼이라 불린 아이들)
Prologue: 축복받지 못한 울음소리
서아프리카 가나의 북부, 붉은 흙먼지가 대지를 뒤덮는 건기(乾季)의 밤. 마을의 적막을 깨고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생명의 탄생은 응당 축복과 환희로 맞이해야 할 순간이건만, 산파의 손에 들린 아이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눈빛에는 공포가 서린다.
아기의 머리가 남들보다 조금 크다. 혹은 다리가 굽어 있다.
그 작은 '다름'을 확인하는 순간, 어머니의 통곡 대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누군가 낮게 읊조린다.
"이것은 인간이 아니다. 숲에서 온 '스피릿 차일드(Spirit Child)'다."
가나 북부의 카세나-난카나(Kassena-Nankana) 지역. 이곳에는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잔혹한 믿음이 있다. 기형이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 혹은 쌍둥이, 젖니가 빨리 난 아이들을 인간이 아닌 '악령의 전령'으로 규정하는 풍습이다. 그들은 이 아이가 마을에 가뭄을 부르고, 전염병을 퍼뜨리며, 부모의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아이를 죽인다. 이것은 21세기 문명사회라 자부하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지구 반대편의 참혹한 '비망록'이다.
'스피릿 차일드'. 우리말로 옮기면 '영혼의 아이' 혹은 '정령의 아이'쯤 되겠다. 단어 자체는 신비롭게 들리지만, 그 실체는 갓 태어난 생명에게 내려지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다.
이 비극적인 낙인은 지극히 자의적이고 비과학적인 기준에 의해 찍힌다.
뇌수종으로 머리가 커진 아이, 구순구개열(언청이)이 있는 아이, 뇌성마비로 몸을 뒤트는 아이, 다운증후군을 앓는 아이. 현대 의학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고 치료나 관리가 가능한 선천적 질병들이 이곳에서는 '악마의 징표'가 된다.
심지어 아이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경우도 있다. 산모가 출산 중에 사망하거나, 아이가 태어난 직후 집에 불운한 일(가축의 죽음, 흉년)이 겹치면, 그 원인은 오롯이 갓 태어난 아이에게 전가된다.
"이 아이는 인간의 탈을 쓰고 우리를 해치러 온 요괴다. 진짜 숲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죽는다."
이 맹목적인 공포는 모성애조차 마비시킨다. 아이를 품에 안아보기도 전에, 어머니는 젖을 물리는 것을 거부당하고 아버지는 장례 준비가 아닌 '처리'를 준비한다. 마을 원로들과 주술사들이 모여 아이의 생사를 결정하는 그 순간, 아이는 이미 '사람'이 아닌 제거해야 할 '불길한 징조'일뿐이다.
악령으로 지목된 아이를 처리하는 방식은 끔찍할 정도로 체계적이다. 그들은 절대 자신들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는다. 대신 '독초 제조인(Concoction Man)'이라 불리는 주술사를 부른다.
주술사는 숲에서 캔 독성 식물과 뿌리, 흙, 그리고 알 수 없는 재료들을 섞어 검은 액체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사약, '조제물'이다.
그들의 논리는 궤변에 가깝다.
"이것을 아이에게 먹여보자. 만약 아이가 진짜 인간이라면 이 약을 이겨내고 살 것이고, 악령이라면 힘을 잃고 죽어 숲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갓 태어난, 면역계조차 완성되지 않은 신생아가 그 독한 혼합물을 견뎌낼 리 만무하다. 아이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서서히 숨을 거둔다. 아이가 숨을 거두면 어른들은 슬퍼하기는커녕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악령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고 떠났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죽은 아이는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 인간이 아니기에 무덤도 없다. 그저 숲 속 어딘가에 버려지거나, 얕은 흙 아래 묻힌다. 그렇게 수많은 생명이 이름 한 번 가져보지 못한 채 숲의 이슬로 사라졌다.
우리는 이들을 미개하고 야만적이라고 손가락질하기 쉽다. 부모가 되어 어떻게 제 자식을 죽일 수 있느냐고 분노한다. 하지만 전문가의 시선으로 이 현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기저에는 단순한 악의가 아닌 '생존의 절박함'과 '구조적 결핍'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첫째, 극단적인 의료 지식의 부재다.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뇌성마비나 뇌수종 같은 질병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그들에게, 몸을 기괴하게 비틀거나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아이의 모습은 의학적 소견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공포로 다가온다.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는 인간을 가장 잔인하게 만든다. 그들은 두려워서 죽이는 것이다.
둘째, 뼈를 깎는 빈곤이다.
이것이 가장 서글픈 원인이다. 가나 북부는 극심한 빈곤 지역이다. 건강한 성인 한 명이 하루 종일 밭을 갈아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고, 평생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장애아의 탄생은 가족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재앙으로 인식된다.
"이 아이 하나를 살리면, 나머지 형제들이 다 굶어 죽는다."
이 잔인한 공리주의적 계산이 무의식 속에 깔려 있다. 결국 '스피릿 차일드' 풍습은 척박한 환경에서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슬프고도 끔찍한 생존 본능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미신은 핑계일 뿐, 본질은 가난이 약자를 지우는 방식인 것이다.
절망만 가득한 것 같은 이 숲에도 빛은 있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살인에 맞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스탠 테레즈 무무니(Sr. Stan Therese Mumuni)' 수녀다. 그녀는 가나 북부에서 '나자렛 고 갓 칠드런(Nazareth Home for God’s Children)'이라는 보금자리를 운영한다.
무무니 수녀는 독초 제조인의 손에서 죽어가던 아이들을 돈을 주고 사 오거나, 몰래 빼돌려 살려냈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악령을 모으는 마녀"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살해 위협까지 당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이 아이들은 악령이 아닙니다. 단지 조금 아플 뿐입니다. 사랑받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녀의 보살핌 아래, 죽을 운명이었던 아이들은 기적처럼 살아났다. 뇌수종 아이는 수술을 받아 머리가 줄어들었고, 뇌성마비 아이는 재활 치료를 통해 걷기 시작했다. '말을 못 할 것'이라던 아이가 학교에 가고, 웃고, 뛰어놀게 되었다.
또한, 아나스 아레메야우 아나스(Anas Aremeyaw Anas)와 같은 탐사 보도 전문 기자의 역할도 컸다. 그는 잠입 취재를 통해 독초 제조인이 아이를 독살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아 전 세계에 폭로했다. 이 충격적인 영상은 가나 정부를 움직였고, '스피릿 차일드' 살해가 명백한 범죄임을 법적으로 공표하게 만들었다.
나자렛 홈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이제 마을로 돌아가 증명하고 있다. 자신이 재앙이 아니었음을. 자신이 살아있어도 마을에 가뭄이 들지 않음을. 오히려 건강하게 자라 학교에 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수백 년 동안 마을을 지배해 온 공포가 허상이었음을 깨뜨리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
한때 '악령'이라 불리며 숲에 버려졌던 소년 '프란시스'는 이제 대학 진학을 꿈꾸는 청년이 되었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뿔이 달렸다고 했어요. 하지만 보세요. 저는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단지 다리가 조금 불편할 뿐이에요."
프란시스의 미소는 그 어떤 웅변보다 강력하게 인간의 존엄을 외치고 있다. 미신과 편견이 아무리 거대해도, 사랑과 진실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가나의 비극을 보며 우리는 분노한다. 어떻게 21세기에 이런 야만적인 일이 가능하냐고. 하지만 비망록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우리 내부로 돌려보고자 한다.
과연 우리는 이 비극에서 자유로운가?
물론 우리는 독초를 먹여 아이를 죽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독초'보다 더 은밀하고 차가운 배제의 시선이 존재한다.
장애인 학교를 짓겠다고 하면 "집값이 떨어진다"며 무릎 꿇은 부모들을 외면하는 사람들. 지하철 시위를 하는 장애인들을 향해 "출근길 막지 말고 집에나 있어라"며 혐오를 쏟아내는 댓글들.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약자를 "비용 덩어리"로 취급하는 시선들.
형태만 다를 뿐, 우리 역시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고, 사회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가나의 숲과 닮아 있지 않은가.
'스피릿 차일드'는 먼 아프리카의 전설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눈감고, 약자를 배제하며, 효율성의 논리로 생명의 가치를 저울질할 때, 우리 마음속에서는 또 다른 '스피릿 차일드'가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문명사회는 얼마나 높은 빌딩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가장 약한 존재를 어떻게 대하느냐로 증명된다.
지구 반대편, 붉은 흙먼지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들의 숲은 안전한가요? 당신들은, 우리를 환대할 준비가 되었나요?"
그 질문 앞에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대답해야 한다. 모든 생명은 태어난 그 자체로 우주이며, 그 어떤 이유로도 부정당할 수 없다고.
악령은 숲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별과 혐오로 굳어버린 우리의 편협한 마음속에 살고 있다고 말이다.
"다리가 불편한 건 저주가 아니에요. 조금 느리게 걷더라도, 함께 가라는 신의 뜻일 뿐이죠."
죽음의 숲에서 구조된 한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했다는 말이 오랫동안 가슴에 가시처럼 박혀 떠나지 않았습니다. 처음 '스피릿 차일드'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제 감정은 끓어오르는 분노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볼수록 마주한 것은 무지가 빚어낸 공포, 그리고 가난이 낳은 깊은 슬픔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눈을 가리고, 무지는 칼을 듭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생명'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아이는 신의 축복이지, 악령의 전령이 아닙니다.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 혹은 우리 가까운 곳에서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을
모든 '스피릿 차일드'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떨고 있을 작은 손들을 잡아주는 마음으로,
그리고 우리 안의 차가운 숲을 걷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바칩니다.
Written by yooda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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