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이름 '위안부'

이작 끝나지 않은 전시 성폭력의 역사

by 유다람

Prologue: 증인이 사라진 시대, 역사의 법정은 문을 닫지 않는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사실(Fact)의 물리적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시선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기억되며, 때로는 투쟁하는 거대한 담론의 장이다. 20세기 인류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반인륜적인 전쟁 범죄 중 하나로 꼽히는 '일본군 위안부(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문제는, 사건 발생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 전쟁(Memory War)'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생존해 계신 피해자들의 수는 이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우리는 곧 '증언자 없는 시대', 즉 '포스트 메모리(Post-memory)'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육성의 증언이 사라진 그 자리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누군가는 망각을 기대하고, 누군가는 왜곡을 시도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상적인 분노나 눈물이 아니다. 냉철한 이성으로 이 범죄의 구조적 본질을 해부하고, 국제법적 관점에서 그 책임을 규명하며, 이것이 왜 보편적 인권의 문제인가를 논증하는 '지성적 기록'이다.


이 글은 '위안부'라는 기만적인 용어 뒤에 숨겨진 국가 범죄의 실체를 역사학적, 사회학적 관점에서 정밀하게 타전(打電)하고자 한다. 이것은 한일 간의 외교적 쟁점을 넘어, 전시(戰時) 하에서 국가 권력이 여성의 신체를 어떻게 식민화하고 도구화했는가에 대한 인류사적 고발이다.

1. 용어의 기만성과 제도의 기원: '위안' 뒤에 숨은 '보급품'의 논리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위안부(慰安婦)'라는 용어는 역사학적으로 매우 기만적이며 가해자 중심적인 단어다. 1930년대와 40년대, 일본군은 자신들의 성폭력 시스템을 행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위안(Comfort)'이라는 단어를 차용했다. 이는 군인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휴식을 제공한다는 명목하에, 피해 여성들을 인간이 아닌 '군수 보급품'의 일종으로 취급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국제 사회와 학계가 이 용어 대신 '일본군 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라고 명명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제도가 개인의 일탈이나 민간 업자의 상업적 매춘이 아니라, 국가가 기획하고 군대가 관리한 '노예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① 제도의 기원: 1932년 상해 사변과 1937년 난징 대학살


일본군이 위안소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배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강간 방지'와 '성병 통제'라는 군사적 목적이 있었다. 1932년 상해 사변 당시 일본군의 무분별한 강간이 국제적인 비난을 사고 반일 감정을 고조시키자, 일본 군부는 '안전하고 통제된 성(Sex)'을 보급할 필요성을 느꼈다. 1937년 난징 대학살 이후 이러한 필요성은 더욱 구체화되었고, 군은 위안소 설치를 공식적인 군사 정책으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② 군수품으로서의 여성: 철저한 관리 시스템


일본군 문서들은 위안부의 이송을 '군수품 수송'으로 분류했다. 그녀들은 탄약이나 식량처럼 취급되어 군용 트럭과 선박에 실려 전선으로 이동했다. 현지에서는 군의 관리하에 정기적인 성병 검진을 받아야 했는데, 이는 여성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사들에게 병을 옮기지 않게 하기 위한 '품질 관리'의 일환이었다. 여성들에게는 이름 대신 번호가 부여되었고, 거주 이전의 자유는 박탈되었다. 즉, 이 제도는 자발적 계약에 의한 노동이 아니라, 신체의 자유와 성적 자기 결정권이 완전히 박탈된 '노예 상태'였다.

2. 동원의 강제성과 식민지성: 제국주의와 젠더의 결탁


일본 정부와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강제 연행의 증거가 없다"거나 "민간 업자의 소행"이라며 국가 책임을 회피한다. 하지만 이는 식민지 지배 구조와 당시의 사회상을 무시한 궤변이다.


① 구조적 강제성 (Structural Coercion)


'강제성'을 단순히 군인이 집에 쳐들어가 총칼로 위협하여 끌고 가는 것(협의의 강제성)으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식민지 백성에게 제국주의 경찰과 관헌,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민간 업자의 요구는 거부할 수 없는 공권력의 압력이었다.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다"는 취업 사기는 당시 빈곤했던 식민지 여성들에게 강력한 유인책이자 함정이었다. 이를 방조하고, 도항 증명서를 발급하고, 수송 수단을 제공한 것은 명백히 일본 정부와 군이었다. 즉, 모집 과정에서의 기망(사기)과 유인은 광의의 강제 연행에 해당하며, 이는 국제법상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


② 식민지 여성의 타자화


일본군은 자국(일본) 여성보다 식민지(조선, 대만, 중국) 여성을 우선적으로 위안부로 동원했다. 이는 제국주의가 식민지 여성을 '이등 국민'이자 '성적 착취가 가능한 도구'로 타자화했음을 보여준다. 일본 여성은 '천황의 적자(赤子)'로서 재생산(출산)의 도구로 보호받거나 정신대(노동)로 동원된 반면, 식민지 여성은 병사들의 성욕 처리를 위한 '배설구'로 취급받았다. 이는 인종주의와 성차별이 결합된 가장 폭력적인 형태의 지배 방식이었다.

3. 침묵의 50년: 냉전과 가부장제가 만든 공백


1945년 전쟁이 끝났지만, '위안부' 문제는 1991년이 되어서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왜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피해자들은 침묵해야 했으며, 사회는 이를 외면했는가? 이 '침묵의 카르텔'을 이해하는 것은 범죄 자체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① 전후 처리의 한계: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도쿄 재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열린 도쿄 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은 일본의 전쟁 범죄를 심판했지만, '성노예' 문제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당시 연합군, 특히 미국은 일본을 냉전 시대의 반공 보루로 삼기 위해 전쟁 책임을 조속히 마무리 짓고자 했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전쟁 중 으레 일어나는 부수적 피해' 정도로 치부되었고, 범죄의 구성 요건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②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모순


박정희 정권 하에서 체결된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청구권협정은 '위안부'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경제 개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일본은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닌 '경제 협력 자금' 명목으로 돈을 지불하며 법적 책임을 털어내려 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청구권 문제는 묵살되었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재는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했다. 국가가 국민의 고통을 헐값에 팔아넘긴 셈이다.


③ 가부장적 순결 이데올로기


가장 뼈아픈 원인은 우리 내부에도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유교적 가부장제와 순결 이데올로기는 피해자들을 '더러워진 여자', '화냥년'으로 낙인찍었다. "살아서 돌아온 것이 죄"가 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임을 주장하기는커녕 죄인처럼 숨죽여 살아야 했다. 가족에게 누를 끼칠까 봐, 자식의 앞길을 막을까 봐 그녀들은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즉, 일본 제국주의가 1차 가해자라면, 피해자를 침묵시킨 한국의 가부장제 사회는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4. 1991년, 역사적 패러다임의 전환: 증언의 폭발


1991년 8월 14일, 故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은 단순한 개인의 커밍아웃(Coming-out)이 아니었다. 그것은 20세기 여성 인권사의 물줄기를 바꾼 혁명적 사건(Historical Event)이었다.


"내가 바로 산 증인입니다."


이 한 마디는 50년간의 침묵을 깨뜨렸다. 김학순의 증언은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성장한 한국 시민사회와 여성 운동의 역량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민주화는 억눌렸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올 공간을 열어주었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여성 단체들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조직화했다.


그녀의 증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 피해자가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로 선언했다는 점이다. 숨어야 했던 수동적 피해자가 광장으로 나와 가해국가를 상대로 죄를 묻는 능동적 고발자로 변모했다.


둘째, 전시 성폭력 문제를 '수치'의 영역에서 '인권'의 영역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을 넘어 중국, 필리핀, 대만, 네덜란드 등 전 세계 피해 여성들의 연쇄적인 증언(Me Too)을 이끌어냈다.

5. 국제법적 승리와 정의의 확립


1990년대 이후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 간의 문제를 넘어 국제 사회의 보편적 인권 의제로 급부상했다. 유엔(UN)과 국제 인권 기구들은 이 문제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채택하며 일본 정부를 압박했다.


①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1996)


유엔 인권위원회 특별보고관 라디카 쿠마라스와미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위안부' 제도를 **"전시 하의 군사적 성노예제(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라고 명확히 정의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주장하던 '상업적 매춘' 논리를 국제법적으로 기각하고, 국가 책임을 공식화한 기념비적인 문서다.


②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


도쿄에서 열린 이 민간 법정은 비록 법적 구속력은 없었으나, 전 세계 법률가와 학자들이 모여 히로히토 천황에게 유죄를 선고했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 이는 "국가 원수도 반인륜 범죄에 대해서는 면책될 수 없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으로, 역사적 정의를 세우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③ 미국 하원 결의안 121호 (2007)


미국 의회가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이 결의안은 일본 정부에게 '위안부' 제도에 대한 공식 사과와 역사적 책임을 요구했다. 이는 이 문제가 동아시아의 지역적 갈등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인권 문제임을 서구 사회도 인정한 결과였다.

6. 역사 수정주의와의 전쟁: 왜곡의 메커니즘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며 우리는 심각한 퇴행을 목격하고 있다. 일본 내 우익 세력의 결집과 아베 신조 정권 이후 강화된 '역사 수정주의(Historical Revisionism)'는 과거의 인정을 거부하고 역사를 다시 쓰려 하고 있다.


① 고노 담화의 무력화 시도


1993년 일본 정부는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담화를 통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군의 개입을 일부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현재의 일본 정부는 이를 검증하겠다며 흠집을 내고, "성노예라는 표현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국제 사회에서 로비를 벌이고 있다.


② 램지어 사태와 학문의 탈을 쓴 왜곡


하버드 대학의 마크 램지어 교수가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규정한 논문을 발표한 사건은, 수정주의가 학문의 영역까지 침투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계약서'의 존재 유무 등 지엽적인 실증주의에 매달려, 식민지 지배라는 거대한 구조적 강제성을 고의로 누락시킨다. 이는 전형적인 '부정의 논리(Denialism)'다.


③ 소녀상 철거 압박


베를린, 미국 글렌데일 등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려는 일본 정부의 집요한 외교적 노력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이 기억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준다. 소녀상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가해자가 지우고 싶어 하는 '진실의 물증'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과거의 전쟁 범죄를 인정하는 것이 일본의 국가적 자긍심을 훼손하고, '정상 국가(전쟁 가능한 국가)'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비뚤어진 내셔널리즘이 어떻게 인권과 진실을 억압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7. 피해자에서 인권 운동가로: 나비의 비상


우리가 이 역사를 기억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지점이 있다. 바로 피해자 할머니들의 주체적 변화다. 그분들은 단순히 "불쌍한 할머니"나 "도움을 받아야 할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았다.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를 비롯한 많은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승화시켜, 전 세계의 또 다른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인권 운동가'이자 '평화 활동가'로 거듭났다.


"나 같은 아픔을 겪는 여자가 다시는 없어야 한다."


이 숭고한 정신으로 그분들은 '나비기금'을 조성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들, 콩고 내전의 강간 피해 여성들을 지원했다. 이는 "내가 당했으니 너희도 당해봐라"는 복수가 아니라, "나의 고통이 너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연대의 정신이다.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전쟁 없는 세상을 외친 그분들의 행보는, 좁은 민족주의에 갇힌 가해자들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되며 진정한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8. 현재진행형의 역사: 우크라이나, 가자, 그리고 우리


혹자는 묻는다. "이미 80년이나 지난 일을 왜 자꾸 끄집어내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기에, 전시 성폭력이라는 야만의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2024년 현재, 러시아가 침공한 우크라이나에서 여성과 아동에 대한 성폭력이 무기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른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충돌이 일어난 가자 지구에서도 여성의 몸은 전쟁터가 되고 있다.


왜 전쟁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반복되는가?


전문가들은 이를 '전략적 강간(Strategic Rape)'이라고 분석한다. 군인들의 우발적인 성욕 때문이 아니라, 적을 파괴하기 위한 군사적 전술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여성은 한 공동체의 상징이자 생명의 근원이다. 여성을 유린함으로써 적의 남성들에게 무력감과 수치심을 주고, 공동체의 결속력을 파괴하며, '적의 피'를 섞어 민족을 말살하려는 가장 비열하고 효율적인 전술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그것은 '전시 여성 폭력'의 원형(Archetype)으로서, 오늘날 분쟁 지역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해석하고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준거점이 된다. 우리가 이 역사를 집요하게 기억하고 가해자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가해자들에게 "반인륜 범죄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경고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Epilogue] 기억은 투쟁이다: 포스트 메모리 시대를 위한 제언


이제 우리 곁에 생존해 계신 할머니들은 극소수다. 머지않아 우리는 육성으로 증언해 줄 피해자가 단 한 분도 남지 않는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역사를 부정하고 지우려는 세력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교묘해질 것이다. "증거가 어디 있느냐", "죽은 자는 말이 없다"며 진실을 덮으려 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우리는 '기억의 연대'를 맺어야 한다.


첫째, 학술적이고 객관적인 기록의 보존이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철저한 사료 발굴, 증언의 채록 및 번역, 국제법적 논리 개발을 통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팩트'의 성을 쌓아야 한다.


둘째, 보편적 인권 교육의 강화다.


다음 세대에게 이 문제를 단순히 '반일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여성 인권'과 '평화'의 차원에서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왜 인류가 함께 부끄러워하고 기억해야 할 역사인지를 이해시켜야 한다.


셋째, 세계 시민 사회와의 연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홀로코스트(Holocaust)와 비견되는 인류의 비극이다. 전 세계의 양심 있는 시민들, 학자들, 활동가들과 연대하여 이 문제를 '글로벌 메모리'로 정착시켜야 한다.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놓인 '빈 의자'.


그것은 떠나간 이들의 자리인 동시에, 지금 우리가 앉아야 할 자리다. 그 의자에 앉아 침묵의 소리를 듣는 것, 그리고 그 소리를 세상에 전하는 것.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지워지려는 이름을 다시 새겨 넣는 작업, 그것은 살아남은 우리 모두에게 부과된 숭고한 의무이자, 가장 치열한 투쟁이다.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물을 것이다.

정의가 바로 설 때까지, 이 비망록의 마지막 페이지는 결코 덮이지 않을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은, 단순한 애국심의 호소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의 법칙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지난 세기의 낡은 앨범 속에 갇힌 이야기가 아닙니다.

국가라는 거대 권력이 개인의 존엄을, 특히 여성의 신체를 어떻게 도구화하고 유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처절하고도 명징한 교과서입니다.

감정적인 분노만으로는 역사를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공부하고,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무장해야 하는 이유는

뻔뻔한 가해자들의 거짓말에 맞서기 위함이며,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있을 또 다른 전쟁 피해자들과 연대하기 위함입니다.

진실에는 시효가 없습니다. 마지막 증인이 사라진다 해도,

기록된 진실은 영원히 살아남아 역사의 법정에 설 것입니다.

그 엄중한 기억의 의무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바칩니다.


작가 유다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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