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 트루먼 쇼와 삭제되지 않는 아이들
Prologue: 2.8kg, 원치 않았던 데뷔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세상이라는 무대에 선다. 하지만 21세기의 아이들은 두 개의 무대에 동시에 오른다. 하나는 물리적인 병원 분만실, 그리고 또 하나는 부모의 SNS라는 거대한 디지털 광장이다.
갓 태어나 핏기조차 가시지 않은 쭈글쭈글한 얼굴, 탯줄을 자르는 순간, 심지어 첫 배변의 순간까지. 아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 모든 사적인 기록은 '전체 공개'되어 전 세계로 송출된다.
"우리 아기 천사, 세상에 온 걸 환영해. #신생아 #육아스타그램 #도치맘"
수십, 수백 개의 '좋아요'와 축하 댓글이 달린다. 부모는 그 반응에 행복해하며 육아의 고단함을 잊는다. 그것은 분명 사랑에서 비롯된 기록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묻지 않았다. 그 사랑스러운 피사체인 아이에게, "너의 이 모습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줘도 되겠니?"라고.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기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장 많은 사생활이 '전시'되고 '박제'되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오늘의 감정비망록은 부모의 스마트폰 속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그러나 현실에서는 고통받을지도 모를 '셰어런팅'의 피해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셰어런팅'. 공유를 뜻하는 'Share'와 양육을 뜻하는 'Parenting'의 합성어다.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요즘 부모들에게, 아이의 일상을 SNS에 올리는 것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물론, 육아는 힘들고 고립된 과정이다. SNS를 통해 아이의 성장을 기록하고, 육아 동지들과 소통하며 위로받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우리 아이가 이렇게 예쁘게 컸구나" 하는 공감과 확인은 양육자에게 큰 에너지가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 기록의 주체가 '아이'가 아닌 '부모'라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아이는 나의 분신이니, 아이의 일상을 공개할 권리도 나에게 있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들은 엄연히 독립된 인격체이며, 자신만의 프라이버시를 가질 권리가 있는 타인이다.
우리가 무심코 올리는 사진들—벌거벗고 목욕하는 모습, 배변 훈련을 하다가 실수한 모습, 떼를 쓰며 우는 우스꽝스러운 영상들—은 부모 눈엔 그저 귀여운 추억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진이 '좋아요'를 받기 위한 도구가 되는 순간, 아이는 주체가 아닌 '콘텐츠'로 전락한다. 부모의 만족감과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아이의 사생활이 화폐처럼 소비되는 것이다.
"엄마, 제발 내 사진 좀 지워줘! 친구들이 다 봤단 말이야!"
최근 청소년들 사이에서 부모와 가장 많이 다투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과거의 SNS 사진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 자신이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의 발가벗은 사진이나 엽기적인 표정의 사진이 인터넷에 떠도는 것은 끔찍한 수치심이다.
인터넷은 망각하지 않는다. 한번 올라간 사진은 무한히 복제되고 공유되어, 원본을 지운다 해도 어딘가에 '디지털 문신'처럼 남는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만의 사회적 자아를 형성해 나간다. 그런데 검색 한 번이면 튀어나오는 과거의 적나라한 기록들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심지어 미래의 연인이나 직장 동료가 그 사진을 볼 수도 있다는 공포. 이것은 아이들에게 '잊힐 권리'를 박탈하는 잔인한 행위다.
실제로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의 동의 없이 사진을 게시하면 사생활 침해로 처벌받을 수 있는 강력한 법적 제재를 가하고 있다. 그들은 일찍이 깨달은 것이다. 아이의 초상권과 프라이버시는 부모의 표현의 자유보다 상위의 가치라는 것을.
셰어런팅의 위험은 단순히 심리적인 수치심에 그치지 않는다. 아이들의 안전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실체적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부모들이 무심코 올린 사진 속에는 너무나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아이의 이름, 생년월일, 다니는 어린이집, 자주 가는 놀이터, 심지어 집의 구조와 동선까지. SNS에 '#OO유치원 #하원길' 같은 해시태그를 다는 것은, 유괴범이나 스토커에게 우리 아이의 위치 정보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과 다름없다.
더욱 끔찍한 것은 '디지털 성범죄'의 표적이 된다는 점이다.
해외의 한 조사에 따르면, 아동 음란물 사이트에 유포된 사진의 절반 이상이 부모가 SNS에 올린 평범한 일상 사진에서 도용된 것이라고 한다. 부모 눈에는 천사 같은 목욕 사진이, 다크웹의 범죄자들에게는 성적인 먹잇감으로 변질되어 소비된다.
또한, 최근 급증하는 '딥페이크(Deepfake)' 기술은 이 공포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 아이의 얼굴 사진 한 장만 있으면, AI 기술을 이용해 끔찍한 아동 성 착취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이다. 내가 사랑해서 올린,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내 아이의 미소가 범죄의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이것은 과장이 아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명백한 현실이다.
셰어런팅이 상업주의와 결합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바로 '키즈 인플루언서'의 등장이다.
아이의 귀여운 외모나 재능을 이용해 수익을 창출하는 유튜브 채널과 인스타그램 계정들이 넘쳐난다. 물론 아이가 즐기는 경우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아이들은 카메라 뒤의 부모가 시키는 대로 연기해야 하는 '아동 노동자'가 된다.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은 자신의 모든 삶이 전 세계에 생중계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다, 진실을 깨닫고 절규한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이 바로 21세기의 트루먼이다.
밥을 먹을 때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도, 심지어 울 때조차 카메라가 들이대어진다.
"자, 구독자 이모들한테 웃어줘야지!", "다시 한번 해볼까?"
아이들은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기 위한 삶'을 연기하도록 훈련받는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정서적 학대에 가까운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가 슬퍼서 우는데 엄마는 달래주는 대신 카메라를 켠다? 이 상황에서 아이가 느낄 박탈감과 불신은 정서 발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로서의 가치'가 있을 때만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낳은 가장 슬픈 아동 학대의 한 형태다.
그렇다면 우리는 SNS를 모두 끊어야 할까? 스마트폰 속의 아이 사진을 모두 지워야 할까?
무조건적인 금지가 정답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식의 전환'과 '새로운 에티켓'이다.
첫째, '검문'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진을 올리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사진을 아이가 10년 뒤에 봐도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모르는 사람이 내 아이의 이 모습을 봐도 괜찮은가?" 조금이라도 망설여진다면, 그 사진은 올리지 않는 것이 맞다.
둘째, 아이에게 '허락'을 구해야 한다.
아이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면, 반드시 물어봐야 한다. "이 사진 엄마 친구들에게 보여줘도 될까?" 아이가 "싫어"라고 말하면, 그 의견을 100% 존중해 줘야 한다. 설령 아이가 너무 어려서 의사 표현을 못 한다 할지라도, 부모는 아이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시뮬레이션을 거쳐야 한다.
셋째, '디지털 가림막'을 쳐야 한다.
아이의 얼굴을 스티커로 가리거나, 뒷모습이나 손발 위주로 찍는 등 신원 노출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름이나 학교 같은 개인 정보는 절대 노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넷째, '비공개'의 미학을 즐겨야 한다.
가장 소중한 추억은 불특정 다수와 나누는 것이 아니라, 진짜 가족과 친구들하고만 나누는 것이다.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하거나, 가족 앨범 앱을 활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좋아요'보다 더 소중한 것
우리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너무나 사랑해서 자랑하고 싶고, 그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기록하고 싶어 한다. 그 마음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것이다.
아이는 나의 트로피가 아니며, 나의 SNS 피드를 채우기 위한 장식품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 작지만 온전한 우주다.
아이들의 가장 예쁜 모습은 스마트폰 액정 속에 있지 않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눈을 맞췄을 때, 렌즈를 통하지 않고 서로를 안았을 때 느껴지는 그 따뜻한 체온 속에 진짜 행복이 있다.
'좋아요'의 숫자가 내 아이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에 아이를 전시하는 대신, 아이의 눈동자에 온전히 나를 비추어주는 시간.
그것이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지켜줘야 할 마지막 예의일 것이다.
혹시 아이가 손으로 카메라를 가릴 때,
"아유, 한 번만! 예뻐서 그래"라며 웃어넘기진 않으셨나요?
아이의 그 거부 몸짓은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
"내 사생활을 지켜주세요"라는 본능적인 외침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무심코 누른 '공유' 버튼 하나가 훗날 아이에게 족쇄가 되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이는 우리에게 온 귀한 손님이지, 우리의 소유물도, 우리의 콘텐츠도 아닙니다.
오늘 하루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뷰파인더 밖의 아이와 진짜 눈 맞춤을 해보세요.
클라우드에 저장된 사진보다 더 선명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당신과 아이의 마음속에 저장될 테니까요.
Written By Yooda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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