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계약자가 아닌 동반자다
Prologue: 웨딩드레스 너머의 진짜 세상
13년. 한 아이가 태어나 중학생이 될 법한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웨딩플래너로 살았다. 매 주말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들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고, 턱시도를 입은 신랑들의 긴장된 어깨를 다독였다. 화려한 조명, 웅장한 음악, 그리고 쏟아지는 축복의 박수. 결혼식장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연출된 낭만의 무대였다. 하지만 예식장의 문이 닫히고, 신혼여행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 뒤 펼쳐지는 '현실'이라는 무대는 전혀 다른 장르였다. 그곳은 낭만보다는 생존에 가깝고, 연출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코로나라는 거대한 파도가 웨딩 업계를 덮치고, 나는 정들었던 플래너 명찰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13년의 세월은 내 몸에 '직업병'처럼 깊이 배어 있어, 여전히 나는 습관처럼 웨딩 업계의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 트렌드는 어떻게 변했는지, 요즘 예비부부들의 고민은 무엇인지.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단어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부의 유난스러운 이야기겠거니 했던 그 단어는, 어느새 결혼 준비의 필수 코스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이름하여 '엑셀 결혼'.
2015년 무렵부터 알음알음 들려오던 이 기조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사랑의 서약을 맺기도 전에, 예비부부들은 낭만적인 편지 대신 차가운 엑셀 파일을 켠다. 가사 노동의 분담 비율을 소수점까지 나누고, 생활비 통장의 입출금 내역을 1원 단위로 관리하며, 양가 부모님 용돈 액수와 명절 방문 횟수, 심지어 싸웠을 때의 사과 방식까지 매뉴얼화한다. 그 빽빽한 칸들 위에 서로의 의무와 권리를 채워 넣고, 최종적으로 '확인 도장'을 찍어야 비로소 결혼 준비가 끝난다.
13년 전,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겠습니까?"라는 주례사의 묵직한 울림에 눈물 짓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건조하고 서늘한 풍경이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요즘 젊은 사람들은 너무 계산적이다", "결혼이 무슨 비즈니스냐"며 혀를 차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오히려 13년 차 전문가의 눈으로,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결혼 15년 차 선배의 눈으로 이 현상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계산기 두드리는 사랑, 그 이면에 숨겨진 불안
'엑셀 결혼'의 등장은 낭만의 실종이 아니라, '불안의 발로'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치솟는 집값, 불안한 고용, 그리고 주변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이혼 소식들. "사랑만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은 이제 순진하다 못해 무책임한 동화 속 대사가 되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엑셀 결혼은 현명하다. 아니, 처절할 정도로 합리적이다. 글로 정리하고 문서화한다는 것은 감정의 영역을 이성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이다. "네가 알아서 좀 해", "적당히 하자" 같은 모호한 말들은 살다 보면 반드시 오해와 갈등의 불씨가 된다. "알아서"의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월 25일, 생활비 100만 원 입금, 가사 노동은 주 20시간씩 분담"처럼 명확한 숫자로 정리된 약속은 다툼의 여지를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싸우더라도 감정적인 비난보다는 "약속 위반"이라는 팩트를 두고 다투게 되니, 감정 소모도 덜하다. 이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그들 나름의 안전장치이자,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현대적인 배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통계는 잔인한 진실을 말해준다. 엑셀 결혼이 유행하고 결혼의 조건이 이토록 명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율 그래프는 꺾일 줄 모르고 솟구치고 있다. 심지어 결혼 생활 1,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갈라서는 신혼 이혼도 급증했다. 그토록 완벽하게 짠 계획표가, 왜 현실의 파도 앞에서는 종이배처럼 무력하게 뒤집히는 걸까.
그것은 결혼이 '계약'을 넘어선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엑셀 파일은 '공정함'을 보장해 줄 수는 있어도, '따뜻함'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너는 너의 몫을 다했는가?"를 따지는 관계는 회사의 파트너십일 뿐,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부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공정함을 따지면 따질수록, 우리는 더 예리하게 상대방의 결점을 찾아내게 된다. "나는 약속대로 설거지를 3번 했는데, 너는 왜 2번밖에 안 했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집은 안식처가 아닌 감시와 통제의 공간으로 변질된다.
'반반 결혼'의 딜레마: 자율성과 이기심 사이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체감한다. 과거, 남편은 바깥양반으로서 생계를 전담하고 아내는 안사람으로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던 '전통적 분업'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남편과 아내 모두가 사회 전선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경쟁하는 '맞벌이'가 기본값이 되었다. 이에 따라 '니 돈은 니 돈, 내 돈은 내 돈'이라는 각자 관리 시스템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경제적 자립은 자존감의 원천이다. 내가 번 돈으로 내 부모님께 맛있는 식사 한 끼 대접하고 싶을 때, 혹은 명절에 용돈을 드리고 싶을 때 배우자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그보다 비참한 일도 없을 것이다. 또 열심히 일한 나 자신에게 근사한 가방 하나, 좋은 신발 한 켤레 선물하고 싶을 때조차 허락을 구해야 한다면, 결혼 생활의 질은 급격히 떨어진다. 서로의 경제적 자유를 존중하고, 각자의 부모님 효도까지 각자가 책임지는 '셀프 효도' 시스템은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는 아주 합리적인 대안이다.
하지만 이 합리성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숨어 있다. 바로 '책임의 실종'이다.
"우리는 맞벌이 부부니까 집안일도, 육아도, 생활비도 정확히 50 대 50이어야 해."
이 기계적인 평등주의가 때로는 가정의 근간을 흔든다. 인생은 엑셀 표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갑자기 아플 수도 있고, 누군가는 회사 사정으로 실직할 수도 있으며, 예기치 못한 사고로 목돈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때마다 "이건 네 사정이니까 네가 해결해"라고 선을 긋는다면, 과연 그것을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까.
최근 내가 듣는 가장 안타까운 이야기 중 하나는 '약속의 파기'에 관한 것이다.
결혼 전에는 당당하게 "맞벌이를 하겠다"라고 약속해 놓고, 막상 결혼 생활이 시작되자 이런저런 핑계로 일을 그만두는 경우다. 물론 건강상의 이유나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일하기 싫어서", "힘들어서"라는 이유로 경제 활동을 중단하면서, 여전히 가사 노동 분담은 '반반'을 요구한다면? 퇴근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온 배우자에게 "나도 하루 종일 집에 있느라 힘들었어"라며 쓰레기 봉투를 내밀고 배달 음식을 시켜준다면?
이것은 더 이상 배려나 사랑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명백한 '계약 위반'이자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다. 결혼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지켜야 할 기본 도리가 있는 법이다. 만약 한쪽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경제 활동을 못 하게 되었다면, 그 에너지는 응당 가정 내부로 향해야 한다. 깨끗하게 정돈된 집, 따뜻한 밥상, 안정적인 육아. 이것은 '노는 사람'이 하는 '하찮은 일'이 아니라, 가정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숭고한 노동이자 경제 활동이다. 밖에서 돈을 버는 배우자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파트너로서의 도리다.
'독박 육아'라는 단어의 폭력성
이 지점에서 나는 대한민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독박 육아'라는 단어에 대해 13년 차 전문가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단호하게 반기를 들고 싶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독박'이라는 단어는 본래 도박 판에서 억울하게 쓴 누명을 뜻한다. 육아를 '독박'이라고 표현하는 순간, 아이를 돌보는 일은 억울한 벌칙이 되고, 피하고 싶은 짐이 된다.
세상에 '독박 육아'는 없다.
우리 부부가 서로 사랑해서, 간절히 원해서 낳은 아이다. 내 아이를 내 손으로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은 부모로서 누려야 할 특권이자 기쁨이지, 남에게 떠넘겨야 할 고역이 아니다.
물론 안다. 아이가 돌이 지나고 어린이집에 가기 전까지, 그 절대적인 돌봄이 필요한 시기는 뼈가 삭을 만큼 힘들다.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때 못 먹는 그 시기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손을 보태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퇴근한 남편도 넥타이를 풀 겨를 없이 기저귀를 갈아야 하고, 아내도 쪽잠을 자며 버텨야 한다.
하지만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고 유치원에 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다시 냉정하게 각자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사회생활을 하며 경제 활동을 하는 배우자도 집 밖에서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 상사의 눈치를 보고, 실적 압박에 시달리며, 감정 노동을 견뎌낸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까지 "네가 더 힘드네, 내가 더 힘드네"라며 고통의 무게를 저울질당해야 한다면, 그에게 집은 안식처가 아니라 제2의 전쟁터일 뿐이다. 육아는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지만, 역할의 분담은 분명히 필요하다. 전업주부라면 주간의 육아와 가사를 책임감 있게 수행하고, 퇴근 후에는 함께 아이를 돌보는 것이 맞다. 그것을 두고 "나만 독박 쓴다"고 불평하는 것은, 밖에서 일하는 배우자의 노고를 깎아내리는 이기심일 수 있다.
나의 이중생활: 계산하지 않는 헌신의 미학
나는 직업이 두 개인 사람이다. 낮에는 남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이고, 밤에는 글을 쓰는 작가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일상이지만, 나는 이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만의 철칙을 지키고 있다.
오후 3시. 점심 장사가 끝나고 브레이크 타임이 되면 나는 가게 문을 나서며 '사장님' 명찰을 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주부'라는 앞치마를 두른다. 가장 먼저 청소기를 돌리고 환기를 시킨다. 밀린 빨래를 정리하고, 아이들의 학원 스케줄을 체크한다. 저녁이 되면 아이들과 반려동물의 밥을 챙기고, 씻기고, 하루 일과를 들어준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고 나면, 식당에서 가져온 직원들의 유니폼과 테이블 린넨을 세탁기에 넣는다. 세탁기가 웅웅 돌아가는 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비로소 책상 앞에 앉아 작가로서의 시간을 갖는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남편은 가게 문을 닫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다.
우리 집 경제권은 내가 쥐고 있다. 남편은 벌어온 돈을 내게 맡기고 용돈을 타 쓴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이것을 권력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 10원을 썼든 100만 원을 썼든, 나는 남편에게 우리의 재정 상태를 투명하게 브리핑한다. "이번 달엔 생활비가 좀 많이 나갔어", "이번에 내 개인적인 일로 큰돈을 썼어. 미안해. 다음 달엔 더 아낄게." 내가 번 돈이라도,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달리는 파트너에게 이실직고하고 때로는 반성도 한다. 이것은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고 경제권을 맡긴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시댁 용돈을 챙기는 것, 부수입이 생기면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 이 사소한 정직함이 우리 부부의 신뢰를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엑셀 파일에는 차마 적을 수 없는, 나만의 '결혼 수칙'을 지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을 위한 사소한 의전'이다.
늦은 밤 돌아온 남편이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안 공기가 쾌쾌하지 않도록 향기를 유지하는 것.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지친 그가 눕는 자리가 늘 뽀송뽀송하도록 2주에 한 번은 반드시 이불을 새것으로, 햇볕 냄새가 나는 것으로 갈아두는 것. 그가 좋아하는 특정 브랜드의 샴푸가 떨어지지 않게 욕실에 채워두고, 귀찮아서 잘 챙겨 먹지 않는 영양제를 눈에 띄는 곳에 두고 챙겨주는 것.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살피고, 시댁의 대소사를 그가 신경 쓰지 않도록 내가 먼저 나서서 챙기는 것.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에 웬 현모양처 코스프레냐", "왜 여자만 그렇게 희생해야 하냐"고.
하지만 나는 이것을 희생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존중'이다.
밖에서 거친 파도와 싸우고 돌아온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적어도 집이라는 항구에서만큼은 온전히 닻을 내리고 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가 내일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충전해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방식이다.
나의 이 노력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남편 역시 그런 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우리 남편은 표현을 잘 하는 남편이지만, 그는 늘 "고맙다", "네 덕분에 산다"는 표현을 잊지 않는다. 내가 글을 쓸 때면 조용히 커피를 타다 주고, 주말이면 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으려 애쓴다. 시댁 식구들 앞에서는 언제나 나를 치켜세우고, 나의 부족한 점을 자신의 허물처럼 감싸준다.
내가 그를 위해 이불을 갈아주는 것이 '노동'이 아니라 '기쁨'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가 나의 수고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엑셀을 덮고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일
15년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며 내린 결론은 하나다.
결혼은 '반반'을 나누는 덧셈과 뺄셈의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색깔이 섞여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는 '물감'의 영역에 가깝다.
엑셀 파일로 완벽하게 정리된 결혼 생활은 깔끔할 수는 있어도 행복하기는 어렵다. 진짜 행복은 엑셀 칸 밖, 계산되지 않은 여백 속에 숨어 있다.
"오늘 당신이 피곤해 보이니까 내가 설거지할게."
"네가 요즘 힘들어 보이니까 내가 주말엔 아이 데리고 나갔다 올게."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빈칸을 자발적인 배려와 희생으로 채워줄 때, 결혼 생활은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너의 희생이 나의 빚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복이 되는 관계.
나의 배려가 너의 권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휴식이 되는 관계.
니 것과 내 것을 칼같이 나누는 차가운 계산기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서서히 물들어가는 따뜻한 수채화 같은 과정.
우리는 숫자로 증명되는 파트너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등 뒤에 업고, 때로는 내가 먼저, 때로는 네가 먼저 발을 내디디며 함께 걸어가는 '인생의 동반자'다.
그러니 이제 막 결혼을 앞둔, 혹은 엑셀 파일을 켜놓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부부들에게 감히 조언하고 싶다.
그 차가운 모니터를 끄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라고.
계산된 공정함보다 더 강력한 것은, 계산하지 않고 내어주는 '측은지심'과 '사랑'이라고.
내가 조금 더 손해 보는 것 같을 때, 억울해하지 말고 한 번 더 웃어보라고.
그 작은 손해가 쌓이고 쌓여, 결국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적금'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집안일은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50 대 50으로 나누지 말고, 서로가 100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라.
그러면 신기하게도, 당신의 짐은 0이 되고 기쁨은 200이 되는 기적을 맛보게 될 것이다.
삭막한 세상,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
가장 내밀한 사랑의 공간인 가정에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엑셀로 만든 결혼 계약서는 분명 똑똑하고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혼을 결심했던 그 순간을 가만히 떠올려보세요.
그것은 조건이 완벽해서도, 계산이 딱 맞아떨어져서도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내 것을 조금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겠다."
"이 사람의 부족한 점을 내가 채워주고 싶다."
그 바보 같지만 위대한 마음, 계산기를 던져버리게 만든 그 용기 때문이 아니었나요?
집안일은 귀찮은 '노동'이기 이전에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구체적인 언어입니다.
비어있는 샴푸 통을 채우고, 눅눅해진 이불을 털어 말리는 그 사소한 손길 속에
"나는 당신을 아끼고 있습니다"라는 무언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완벽한 분담표를 만들기 위해 얼굴을 붉히기보다,
오늘 지쳐서 돌아올 배우자를 위해 따뜻한 눈빛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요?
결혼의 기적은 엑셀 파일이 아니라, 바로 그 따뜻한 틈새에서 시작되니까요.
Written By Yooda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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