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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 분양 사기를 당한 김 부장 이야기

사무관 출신 변호사의 대형로펌 적응기 - 13

by 사무관과 변호사

요즘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 이야기')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내가 전문직 자격증이 전혀 없는 공무원으로 일해본 경험이 있어서일까, 김 부장 이야기에 나오는 직장 생활을 보며 'PTSD'를 겪을 때도 꽤 있다(내가 변호사로만 일해봤다면 아마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직에 있을 때 아무리 잘 나갔더라도 일단 퇴직하고 나면 그저 동네 아저씨1일 뿐이라는 점, 직장 다니는 동안 재테크를 잘 해놓지 않았다면 아무리 고위직에서 퇴직했더라도 퇴직 후에는 당장 생활비를 걱정해야 한다는 점 등등. 직장생활을 좀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민해봤을 그런 문제들이 다시 떠오르고는 한다.


반면 변호사로서 일해본 경험에 비추어 공감가는 내용도 있다. 바로 김 부장이 상가 분양 사기를 당하는 에피소드다. 오늘은 내가 그 에피소드를 보며 생각한 점을 써보려고 한다.




지난 글에서도 여러 번 말했듯이 나는 건설부동산팀에 속해있다. 건설부동산의 영역은 정말 넓어서, 아파트나 상가, 생활형숙박시설과 같은 부동산의 '분양'도 포함된다. 그래서 나도 분양받은 사람(수분양자, 受分讓者)들이 분양사를 상대로 제기하는 소송을 여럿 수행해보았다(보다 정확히는 분양사 대리였지만 말이다).


이런 소송에서 수분양자들의 주장은 대동소이하다. 내가 착각에 빠져서, 또는 속아서 잘못된 계약을 체결한 것이니 계약을 무효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곤 계약이 무효이므로, 분양사에게 지급해야 할 돈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이미 지급하였다면 그 돈을 돌려달라고 주장한다.


이런 소송은 대개 소형 로펌에서 수분양자들을 최소 수십 명 모아 제기한다. 수십 명 수준이 아니라 수백 명 단위를 모아서 제기하는 경우도 꽤 있다. 이를 보통 '기획소송'이라고 하는데, 의뢰인이 변호사를 찾아가 제기하는 일반적인 형태의 소송이 아니라, 소형 로펌에서 먼저 소송을 기획하고 수분양자들에게 접근하여 참가자들을 모집한 후 제기하는 소송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기획소송에서 수분양자들이 승소하는 사례가 드물다는 점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명백히 사기인 경우는 논외로) 요즘 분양사들은 이미 소송에 대한 준비를 잘 갖춰놓은 경우가 많다. 분양사 임직원들은 보통 분양 업무를 계속 해왔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획소송을 많이 겪어봤기에, 분양 과정에서 혹시 계약이 무효로 돌아갈 우려는 없을지를 계속 점검하고는 한다. 더 철저한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로펌의 자문을 받아가며 리스크를 최소화하기도 한다. 이렇게 준비가 된 분양사를 상대로 소를 제기해봤자 잘 풀릴 리가 없다. 결국 돈과 시간만 날리고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설령 분양사에게 귀책사유가 있어 수분양자들이 승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양사는 나름의 대응방법이 있다. 무슨 의미인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테니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1개 호실당 분양가가 5억 원이고, 수분양자가 200명인 상가 분양 사업에서, 수분양자 100명이 모여서 기획소송을 제기했다. 분양사 입장에서는 패소하면 1,000억 원짜리 사업에서 500억 원을 돌려줘야 한다. 500억 원만 돌려주면 다행이고, 보통 이런 경우에는 소송 소식을 들은 나머지 수분양자들도 같은 이유를 들며 소를 제기하기 때문에, 1,000억 원 전부를 돌려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그래서 분양사는 정말 '사력을 다해서' 소송에 응한다. 소를 제기한 수분양자들이 긴 소송과정에서 제풀에 떨어져 나가도록 시간을 끌기도 한다.


그뿐인가. 최악의 경우 수분양자는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돈은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한꺼번에 수백억 원 내지 수천억 원을 돌려줘야 하는 상황에 놓인 분양사가 파산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승소 판결문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이익을 보는 건 소송을 기획했던 로펌뿐이다.




그렇다면 수분양자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제일 좋은 것은 애초에 함부로 분양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이미 분양계약을 체결해버렸다면 말이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분양계약의 문제를 찾아냈음을 전제로) 기획소송이 제기되기 전에 분양사와 별도로 접촉하여 비밀유지를 조건으로 계약 해제의 합의를 하는 게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분양사 입장에서는 기획소송까지 이어지는 것보다는 손해를 덜 볼 수 있고, 수분양자 입장에서는 굳이 소송까지 가지 않고 빠르게 돈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수분양자가 소를 제기할 경우 승소가능성이 어느정도 있다는 전제에서 하는 말이다.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것이라면 분양사에서 당연히 거절할 것이다.


그러니 김 부장은 상가 분양 사기를 당한 것을 깨달은 즉시, 변호사를 찾아가 소송을 해야 할지, 하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상담을 받아봐야 했다. 앞서 보았듯이 분양 관련 분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분양사가 분쟁에 대한 준비를 갖추기 때문에 수분양자에게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의사와 마찬가지로, 변호사는 일찍 찾아갈수록 손해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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