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패소할 게 자명해보여도 소송을 해야 하나

사무관 출신 변호사의 대형로펌 적응기 - 12

by 사무관과 변호사

며칠 전 뉴진스 멤버들이 어도어 복귀를 선언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소송 패소였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애초에 뉴진스 멤버들이 승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판결 결과에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뉴진스의 어도어 복귀선언은 내가 종종 하던 고민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바로 '질 게 뻔해보여도 소송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다.




사실 패소가 예상되더라도 소송을 강행하는 사례는 많다. 승패와 무관하게 소송을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익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행정기관이 하는 '면피성 소송'이다.


내가 공무원으로 일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 팀이 담당하던 업무 중에는 부동산 개발사업이 있었다. 본 사업은 완료된지 이미 오래였지만 종결 처리가 되지 않아 우리 팀에 분장되어 있었다. 얼마나 잊혀진 업무였던지, 팀장인 나조차도 어느 날 판결문을 송달받기 전에는 우리 팀 소관업무인지도 몰랐을 정도였다.


그 소송은 환매청구 사건이었다. 토지를 수용당한 이전 소유자가 '내 토지는 실제 공익사업에 쓰이지 않았으니 내가 되사겠다'고 제기한 것으로서, 1심과 2심 모두 우리의 완패였다(내가 송달받은 판결문은 2심 판결문이었다). 판결문을 읽어본 나는 상고하더라도 2심 판결을 뒤집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 때 나는 변호사가 아니었지만, 마침 위 판결은 내가 행정고시를 준비하며 공부했던 행정법 관련 내용이라 판결문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법원에 상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질 게 뻔한데 굳이 변호사 선임료를 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 직속상사였던 과장님은 생각이 달랐다. 2심에서 포기해버리면 나중에 감사를 받을 때 책잡힐 수 있다, 무조건 3심까지는 가야 한다는 게 과장님 의견이었다. 그렇게 3심까지 가게 되었지만, 결과는 역시나 우리의 패배였다.


민간기업이라고 해서 사정은 다르지 않다. 내가 맡고 있는 사건 중에는 고객이 공사대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현금이 없으니 일단 시간만 끌어달라, 패배가능성이 높더라도 상관없다'는 사건도 있다.


사실 이런 사건들을 수행하는 건 그리 즐겁지 않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거북했다. 그래서 뉴진스 사건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저 사건을 수행한 변호사들은 자신들이 질 거라는 걸 뻔히 알았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사건을 맡은 걸까, 허탈함이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은 단 하루만에 바뀌고 말았다. 정말 우연히도, 바로 그 다음날 우리 로펌이 승소가능성이 아주 낮았던 소송에서 이겨버린 것이다. 1심에만 1년을 넘게 끌어온 사건이었는데, 이전에 이 사건을 담당하던 파트너는 이미 고객에게 질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 상황이었고, 나 역시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소송 도중 우리가 그간 주장해온 것과 반대되는 취지의 고등법원 판결들이 연속해서 선고되면서 우리 쪽에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상대방은 위 고등법원 판결들을 인용하면서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재판부도 변론종결한 상황이었다(쉽게 말해 심리가 끝나고 판결문 작성 단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마지막 동앗줄 잡는 심정으로 낸 서면이 재판부의 마음을 흔들었다. 우리 로펌에서 담당 파트너가 교체되면서 새로운 주장을 했는데 그게 먹혀든 것이다. 사건이 특정될까봐 무슨 주장이었는지 그 내용을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간략히 하면 '소멸시효'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쉽게 말해 시간이 너무 지났는데 지금 와서 청구하면 어떡하느냐는 주장이다). 행정소송인데다 일반적으로 소멸시효가 문제되는 사안도 아니어서 쉽게 떠올리지 못한 생각이었는데, 우리의 주장에 부합하는 내용을 판시한 대법원 판결이 불과 2년 전에 있었던 것이다. 그에 관한 평석도 논문도 전혀 없어 알려지지 않은 판결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판결을 알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우리 로펌이 수행한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졌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가 이길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결국 우리의 서면에 설득된 재판부는 변론을 재개하고 상대방에게 반박논리를 제출하라고 했다(변론재개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러나 상대방은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하다가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서 일하며 이렇게 극적인 승리를 본 건 처음이었다.




이 사건은 내 생각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사실 지금까지 나는, 고객이 제공한 사실관계만 훑어보고서 승소와 패소를 속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패소할 것 같아보이면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고, 아주 열심히 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선배 변호사들은 달랐다. 사건이 아무리 불리해 보여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뒤집을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실마리가 예상하지 못한 곳(과거 우리가 패소했던 사건)에서 나왔다.


이 일을 겪고 나니, '질 게 뻔해보이는 사건'이라는 내 판단 자체가 얼마나 가벼웠는지, 그리고 변호사가 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처음 인상만으로 사건의 승패를 쉽게 재단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렇게 나는 변호사가 되어가고 있다.
























keyword
이전 20화서는 데가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