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관 출신 변호사의 대형로펌 적응기 - 10
며칠 전 행정고시 동기가 나에게 로스쿨 진학에 대한 의견을 물어왔다.
나는 그가 로스쿨 진학을 고민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모른다. 구체적인 이유를 안다고 하더라도 내가 '로스쿨을 가라, 가지 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다. 나는 내 동기가 아니니, 내 동기가 로스쿨 진학 후 (정확히는 변호사로 직업을 바꾼 후) 만족할지 만족하지 않을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변호사로 일하며 실제로 경험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있었다.
변호사가 되기 전에도, 그러니까 사무관으로 일하던 당시에도 대형로펌 변호사의 업무량에 대해서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다들 업무량이 정말 많다는 소리뿐이었다.
사실 그 때의 나는 (대단히 건방지게도) 업무량이 많아봤자 얼마나 많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원래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어려움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기 마련이다. 더욱이 나는 사무관으로 일해봤으니, 변호사가 되더라도 업무량에 대한 적응은 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대형로펌의 업무량은 생각보다도 더 많았다. 특히 지난 9월은 너무 힘들어서 출근하는 도중 지하철 바닥에 그냥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할 정도였다. 10월에는 조금 나아졌지만 바쁜 건 여전하다. 오늘도 오후 11시쯤 퇴근했으니까.
(너무 힘들 때면 보는 책이다. 제목만 얼핏 보면 마치 '누칼협' 내용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너무 힘들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변호사는 왜 이렇게 바쁜 걸까?
경제학적으로 보자면 법률 산업이 노동집약적 산업이기 때문이겠지만, 이러한 거시적인 접근으로는 독자들이 변호사의 업무량에 대하여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얼마 전 공무원 선배들과 술자리를 할 일이 있었다. 그 중 한 선배가 나에게 가장 최근에 수행한 사건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선배는 간단한 대화주제로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대답을 바로 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내가 수행하던 사건이 60건이 넘었기 때문이었다. 하루에도 3~4건의 사건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는데(오전에는 A 사건, 오후에는 B 사건, 저녁에는 C 사건을 하는 식으로), '최근 사건'이라고 하니 순간적으로 '뇌정지'가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수행하는 사건이 송무와 자문을 합쳐 80건이 넘는다.
물론 그 80건이 모두 서로 다른 사건은 아니다. 본안소송과 가압류, 가처분 같은 사건이 합쳐지면, 사실관계는 똑같은데 사건 수는 2개가 된다. 본안소송의 진행과정에서도 파생되는 자잘한 사건들이 있다. 이처럼 동일한 사실관계에서 사건은 4~5개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서면은 사건별로 따로 제출해야 하지만.
송무가 아닌 자문 건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변호사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문 회사 또는 사업당 1건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내가 A회사에게 법률자문을 하고 있다면 1건으로, A, B회사에게 자문을 하고 있다면 2건으로 본다. 그런데 자문 사건 1건당 실질적인 업무량은 시기에 따라 들쑥날쑥하다. 어떨 때는 동일한 회사로부터 자문요청이 매일같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한 달에 1건도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송무와 자문 80건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건 아니다. 'A, B, C, D 사건 ...'과 같이 순차적으로 사건들을 해결할 수는 있다. 문제는 사건 수가 워낙 많다 보니 A 사건의 당면과제를 끝내면 그 다음에 바로 B 사건이, 그 다음에 C, D 사건이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변호사의 업무는 수십 개의 공으로 하는 저글링과 비슷한 면이 있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문제들을 재빠르게 쳐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별 사건별 업무량은 어떨까. 이번 주는 나에게 '고난의 행군'이었는데, 주로 형사 사건들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중 한 사건은 증거기록만 28,000페이지가 넘는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기록은 다 보지 못했다. 지금 작성하는 서류에 필요한 증거들만 발췌해서 본 수준이다. 그것만 하더라도 하루에 수백 페이지는 봐야 했다. 그리고 당장 내일은 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공판에 가야 한다. 다음주의 예상업무량을 고려하면, 내일 이동시간에 노트북으로 행정사건 자문 1건도 처리해야 할 것이다.
다른 로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로펌에서 형사사건은 기피업무다. 업무량이 절대적으로 많고, 압수수색 대응과 같이 지방 출장을 갈 일도 많은데다가, 일 자체가 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매우 용감하게도 파트너 변호사들에게 형사 사건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변호사라면 민사, 행정뿐 아니라 형사 사건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주 고난의 행군을 하며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내 동기에게는 이처럼 변호사가 많이 바쁘다는 사실을 솔직히 말해주었다. 내가 사무관 때 이른바 '빡센' 곳에서 일을 하진 않았지만, 대형로펌의 업무량은 사무관 때의 업무량의 2~3배는 된다고, 업무량이 적어도 소득은 높일 수 있도록 전문성을 확실히 갖추고 나오든지 아니면 업무량에 대한 각오를 하고 나오라고 말이다.
동기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동기가 최선의 선택을 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