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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데가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사무관 출신 변호사의 대형로펌 적응기 - 11

by 사무관과 변호사

서는 데가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웹툰 원작의 드라마 <송곳>에 나오는 명대사다. 위 대사가 지적하는 것처럼, 사람은 처지가 달라지면 가치관 내지 특정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무관일 때와 변호사일 때의 사고방식은 서로 다르다.

오늘은 이에 대하여 써보려고 한다.




나는 지금도 공무원 때 친했던 사람들과 종종 만나고는 한다. 보통 4명 정도로 만나는데, 그 중 공무원이 아닌 사람은 나 하나다. 대화주제는 당연히 공무원들이 관심을 갖는 주제로 흘러가게 된다. 그리고 공무원들 사이에서 '스테디셀러'인 주제는 바로 승진이다.


사실 공무원들이 승진에 관심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다. 이미 지난 글들에서 말했듯이, 공무원도 결국은 직장인일 뿐이고, 직장인의 삶에 승진은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아니, 공무원은 일반 사기업 직장인보다도 '승진'의 무게감이 훨씬 크다. 그나마 이직이 가능한 사기업 직장인과 달리 공무원은 오로지 '승진'으로만 연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거듭 말하지만 공무원의 연봉 산정에 그 공무원이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어떠한 분야에 어느 정도의 전문성을 갖추었는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어디 연봉뿐이랴. 공무원 사회에서 직급은 곧 인격이다. 높은 직급에 있는 자는 업무 외적으로도 '높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물론 한국에서 그렇지 않은 조직을 찾기가 더 어렵겠지만, 공무원 조직은 그 정도가 심하다. 내가 퇴직을 결심하게 만든 그 국장님은 자신의 직급을 '욕설 및 폭행 자유이용권' 정도로 생각했으니까.


얼마 전 일이다. 요즘 나는 중앙행정기관이 고객인 사건에 보조 역할로 들어가 있어 그 기관과의 회의에 참석할 일이 잦았다. 그 기관에서는 항상 공무원들이 여러 명 왔는데, 정말 내가 기억하는 공무원식 일처리 그 자체여서 속으로 쓴웃음을 지은 적이 많다. 그 중 하나는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야, 너'라고 하며 손짓으로 지시하고, 부하직원은 이에 철저히 복종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부하직원이 편하더라도 적어도 다른 기관 사람들 앞에서는(우리 로펌뿐 아니라 다른 로펌들 서너 곳도 함께 수행하는 큰 사건이었다) 직원에 대한 존중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남들 앞에서는 호칭은 물론, 말투도 경어를 쓰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난 사무관으로 일하던 시절 나보다 어린 주무관에게 단 한 번도 반말을 쓴 적이 없다. 그게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관에서 온 고위공무원은, 역시라고 할까, 그런 예의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무원들은 승진에 관심이 많다. 더 넓게 보면 인사이동과 조직개편에도 관심이 많다. 승진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런 주제들에 별로 관심이 없다. 공무원으로서의 승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로펌 내부에서의 승진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개인으로서의 나'의 성공과 '로펌 변호사로서의 나'의 성공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애초에 조직에 종속되는 삶이 싫어 공무원을 그만둔 사람이다. 그런데 로펌 변호사로서 내부 승진에 집중하다 보면 로펌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변호사는 이직이 자유로운 직업인데 로펌에 종속된다니, 선뜻 이해가 되질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변호사도 오래 근무할수록 로펌에 종속되는 것은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대형로펌은 규모가 크다보니 변호사 개개인이 처리하는 업무분야는 매우 좁다. 당연하다. 조직이 커질수록 조직구성원의 담당업무는 쪼개지기 마련이니까. 문제는 변호사 개개인의 업무분야들이 기업법무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금융기관의 규제에 대응하는 업무를 하는 대형로펌 변호사 A가 있다고 해보자. 우리나라에 위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로펌은 몇 없으므로 A의 이직처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나마도 대형로펌의 연봉수준은 비슷비슷해서, A가 지금껏 일해온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유인도 낮다. 그렇다고 A가 개업을 할 수 있을까? A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기업들은 A를 보고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A가 소속돼있는 대형로펌을 보고 일을 맡기는 것이어서, A는 기존에 하던 업무를 수임할 수가 없다. 결국 대형로펌 변호사는 로펌을 오래 다닐수록 선택지가 줄어드는 것이다.


A가 다행히 영업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매출을 많이 올리는 사람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출자해서 '진짜 파트너 변호사'가 될 수 있을 테니까(진짜 파트너 변호사와 가짜 파트너 변호사의 구별법은 https://brunch.co.kr/@b3f354978f7046b/15 참조). 그러나 매출을 많이 못 올리는 변호사라면?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그래서 나는 요즘 '로펌 변호사로서의 나'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나'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조직에 완전히 종속되었던 공무원이던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고민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조직에 종속되지 않는 변호사는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고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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