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관 출신 변호사의 대형로펌 적응기 - 21
로펌에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지금 로펌을 창립해 대형로펌으로 성장시킨 후 은퇴한 변호사님과 식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새로 들어온 변호사들과 한 번씩 식사를 하는 걸 관례처럼 이어오고 있었다.
함께 식사를 하게 된 내 입사 동기들은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마냥 싫지는 않았다. 그 정도 경력을 가진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얻게 되는 통찰이 있기 마련이다. 배울 점이 딱히 없더라도 대형로펌에서 수십여년을 보낸 사람은 어떤 식으로 사고하는지 관찰할 수 있는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면 자연히 내가 이 곳을 오래 다닐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있을 터였다.
식사자리는 내 생각보다 더 즐거웠다. 그 분이 의외로 유쾌했다거나 말주변이 좋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분의 말씀에 곱씹을 만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그 분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AI의 변호사 대체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표현까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강 이런 취지였다).
"AI가 변호사를 대체할지 안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AI 관련 법률수요가 증가할 거라는 점이야. 그러면 개인정보나 정보보안 분야 변호사 수요도 크게 늘지 않겠어? AI가 변호사를 대체하느니 마느니 걱정할 시간에 관련 분야를 공부해서 그 흐름을 타는 게 훨씬 낫지."
나는 그 분 말씀에 크게 공감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분은 우리에게 AI와 관련된 내용 외에도, 변호사가 어떻게 전문분야를 선정해야 하는지, 그 후에 영업(많은 사람들이 마케팅이라고 표현하나, marketing과 sales는 구별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새삼 사무관과 로펌 변호사 간에 사고방식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지난 글들에서 여러 번 말했지만,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무관(실무상 '고시사무관'이라고 부른다)이라고 해봐야 조직의 부품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무관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설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조직의 인력수요에 따라 인사발령이 나고, 정치인과 상사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하며, 승진 역시 인사권자의 의중에 따라 이루어진다. 승진을 하더라도, 어떠한 보직(즉, 업무)를 맡게 될지 자신이 전혀 결정할 수 없다.
고시사무관의 맹점은, 직장생활의 처음을 높은 직급에서 시작하고 '업무'(커리어를 말하는 게 아니다)에서의 권한도 크기 때문에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인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20대 중후반에 갓 사회로 나온 사람들의 경우, 조직 내에서 주류로 대접받고 업무권한까지 상당하니 자칫 자신이 나름의 재량을 누리며 커리어를 설계하고 있다고 착각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실 주류로서의 지위나 권한이라는 것은 '나'라는 개인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라 '조직'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다. 그리고 조직은 언제든 나를 주류에서 비주류로, 권한이 있는 자리에서 권한이 없는 자리로 이동시킬 수 있다. 나의 지위와 권한은 오로지 조직의 판단에 달려있다.
반면 변호사는 어떠한 분야를 전문분야로 삼을지, 어떤 업무는 수행하고 수행하지 않을지, 장기적인 커리어를 어떻게 설정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물론 변호사에게도 현실적인 한계는 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건설부동산이라는 분야는 내가 선택했지만, 로펌을 다니며 배당받은 업무들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파트너들이 일방적으로 나에게 배당한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의 커리어 방향에 불만이 있다면 지금 로펌을 퇴사하고 다른 로펌으로 옮겨간다든지, 개업을 한다든지와 같은 방안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소득이 크게 줄어들 수는 있지만 어찌됐든 '가능'은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무관은 당장 소득이 끊겨버리므로 변호사와 같은 선택이 불가능하다.
위와 같은 직업 특성의 차이로 인해 사무관과 변호사는 사고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된다.
얼마 전 있었던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생각해보자. 개인정보 보호나 보안 관련 법령을 담당하는 사무관들은 이러한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법령을 정비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긴 하겠지만 담당자인 사무관의 의견도 반영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는 사무관의 재량이 크다.
그러나 사무관 개인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법령정비 업무를 어떻게 처리하든 그의 커리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업무처리과정에 큰 잘못만 없다면 그 사무관의 연봉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승진이 빨라지는 것도 아니다. 만약 담당사무관이 그 업무를 아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나중에 그 사무관이 승진해서 과장이 되고 국장이 됐을 때 다시 관련 분야로 인사발령을 받게 될까? 그것도 전혀 알 수 없다. 내가 이미 여러 번 말했듯이 공무원 조직은 인사발령을 할 때에 개인의 경험이나 전문성을 신경쓰지 않는다. 나만 보더라도, 나는 코딩이나 전산 쪽에 아무런 경험도 지식도 없었지만 '국어를 잘하면 수학도 잘하기 마련이다'라는 황당한 논리로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팀의 팀장으로 발령난 경험이 있다(제1화 참조. https://brunch.co.kr/@b3f354978f7046b/3). 더구나 해당 분야에서 계속 일하는 게 추후 승진 내지 커리어에 도움이 될지도 미지수다. 오히려 기피업무 또는 자신이 싫어하는 업무에 자꾸 끌려들어가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반면 변호사는 같은 사건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다. 기업들을 상대로 개인정보 규제 강화에 대응하는 컴플라이언스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있고, 아니면 반대로 쿠팡 이용자들을 모아 쿠팡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방향은 설정되었더라도 수임이 어렵다면? 어차피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은 반복될 테니 다음 기회를 노린다는 마음으로 변호사로서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서 몇 년 근무하다 나올 수도 있고, 대학원에 진학해 관련 학위를 받을 수도 있으며, 개인정보 규제 관련해서 논문이나 책을 쓸 수도 있다. 즉, 변호사는 자신의 고객을 누구로 설정할지(기업 - 개인), 설정된 고객에게 소구(appeal)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등을 모두 자기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사무관과 변호사가 처한 상황이 이렇게 달라서일까. 나에게 로스쿨 진학여부 상담을 요청해온 고시사무관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변호사가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해왔다. 나는 그러한 질문을 들을 때마다 조금 당황하곤 했다. 그 질문은 사회의 변화가 개인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 개인이 사회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나갈 수 있는 존재라는 건 상정하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변호사라는 직업은 변화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만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비교적 큰 직업이다.
그래서 나는 AI가 변호사를 대체할지 여부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AI 산업의 성장으로 어떤 새로운 법률 수요가 생길지,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편이 훨씬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그 날 식사 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는 단순히 AI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즉, 마케팅 이론에서의 positioning)할 것인지에 대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조직이 정해준 역할과 틀 안에서 움직이는 것과, 나 개인이 스스로 역할을 만들어가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차이가, 사무관과 변호사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