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관 출신 변호사의 대형로펌 적응기 - 22
내가 속해있는 로펌에서는 매년 한 차례 파트너들이 어쏘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개별적인 대면 평가를 한다. 모든 파트너가 참여하는 건 아니지만, 파트너들 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몇 명이 다른 파트너들의 평가까지 취합하여 지난 1년 간 어떤 점이 좋았고, 아쉬웠는지를 이야기하는 자리다.
나는 이번 대면평가 자리에서 '상반기에는 시간효율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하반기에는 개선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간효율성이란 쉽게 말해, 해당 사건의 수임료 대비 담당 변호사가 들인 시간을 말한다. 즉, 나는 남들이 1시간이면 할 일을 2시간은 걸려 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실제로 2배까지는 아니겠지만).
반면 업무의 결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괜찮았다. 오히려 나에 대한 긍정평가들은 공통적으로 나의 장점을 '꼼꼼함'과 '적극성'으로 꼽았다. 종합하면, 나에 대한 평가는 '꼼꼼하고 열심이긴 하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살면서 스스로를 꼼꼼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이런 평가가 의외였다(어릴 때는 부모님이 나를 '덜렁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이번 평가를 듣고 대체 무엇이 나를 '꼼꼼한' 변호사로 만들었는지 생각해보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사무관으로 일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내가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의 수습근무를 마치고 막 부처배치를 받았을 때의 일이다. 내가 처음으로 받은 업무는 일본의 어떤 제도를 분석하여 우리나라에 참고할만한 내용이 있는지 검토하여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대학생 티를 벗지 못했던 나는 한국에서 출간된 관련 논문을 찾아 요약해 보고했다. 일본의 제도를 다른 나라들의 제도와 비교한 논문으로, 주제는 딱 맞았지만 몇 년 전에 나온 것이라 지금은 제도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막연히 괜찮겠거니 하고 위와 같이 일을 했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폐급의 행동이었다.
내게 그 업무를 지시했던 과장님은 인격적으로 훌륭했던 분이었기에 나에게 면박을 주시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내게 "김 사무관, 그 논문은 이미 본 거야"라고만 말했다.
비로소 내 잘못을 깨달은 나는 일본의 원자료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일본어보단 영어가 편하니 먼저 일본 정부에서 펴낸 영문자료를 찾아봤지만, 일본 내수용 제도이다 보니 영문자료가 거의 없었다. 결국 일본어로 된 자료들을 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중국사광(狂)이어서 한자에는 익숙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본어 자료들을 찾아보니 정말 생소한 용어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일본 정부보고서에 '해당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헤이세이 몇 년에 내각정령을 개정하였다'는 취지의 표현이 나오면, 헤이세이가 무엇인지(나는 그때 처음으로 일본이 아직 연호를 쓰고 있는 나라라는 걸 알았다), 내각정령은 또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걸 알고 나서는 어디에서 구체적인 개정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지 찾아 헤맸다. 이처럼 어떤 제도의 분석에는 배경지식도 필요했다.
그렇게 며칠에 걸친 조사가 끝나고 과장님께 다시 결과를 보고했을 때, 과장님은 더 이상 내 보고내용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과장님이 무얼 물어보더라도 그때마다 내가 출처를 대며 막힘없이 대답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 보고서는 별 문제 없이 부기관장까지 보고됐다. 막상 검토하고 보니 우리와 일본의 체계가 크게 달라 우리나라의 제도 개선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이 때의 경험은 갓 사회에 나온 나에게 일종의 기준을 만들어주었다. 앞으로 일을 할 때 어느정도까지 파고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었다.
그 후 사무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나는 가능한 한 그 기준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물론 업무마다 강약 조절을 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항상 근거를 확인하고, 원자료를 찾아보는' 태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한 점은, 내가 종종 대충 해서 넘기려고 할 때마다 상사들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서는 '근거를 확실히 확인해본 것이 맞느냐'며 나를 혼내고는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꼼꼼한' 업무스타일을 체화할 수밖에 없었다(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 '꼼꼼하다'는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다).
변호사가 된 지금도 그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법률자문 의견서를 쓸 때 거의 모든 문장을 공신력 있는 자료(하급심 판결문이나 주석서, 중앙부처들의 유권해석 등)에서 따오고 그 출처도 분명히 밝힌다. 송무서면을 쓸 때도, 상대방이 제출한 서면과 증거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살펴보는 편이다(어떤 변호사들은 서증까지는 모두 보지 않기도 한다). 앞에서 말했던 사무관 시절 형성된 업무습관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변호사이니 시간효율성을 위해 나의 이런 '꼼꼼한' 업무습관을 내려놔야 할까? 내 성향 자체가 그렇게 바뀌어버린 것인지, 시간효율성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음에도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다. 물론 꼼꼼함을 포기하고 효율성을 택하는 것이 합리적인 대안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방향은 그 반대다. 요즘 나는 꼼꼼함을 유지하면서도 효율성을 높일 수는 없는지 고민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민은, 단순히 업무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직업이 요구하는 기준과 다른 직업에서 내가 형성해온 기준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 간극을 줄이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기존의 기준을 완전히 버리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조정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과정 자체가, 내가 변호사로서 성장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