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고사리발에서 마주한 나의 미안함
딸과 함께 성장하는 부모의 뒤늦은 사랑
가끔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듯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고사리 같은 맨발로
파란 잔디밭을 난생처음 내딛으며,
양발도 제대로 씻지 않은 채 서 있던 제 딸아이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모습 속에서
저는 늦게야 비로소 피어나는
미안함이라는 먹먹한 감정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제 딸이 10개월쯤 되었을 때였을까요.
아직 발이 채 땅에 익숙하지 않았을 그 무렵,
저는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자라야 한다’는 믿음으로,
파란 잔디밭에 딸을 내려놓았습니다.
맨발로 촉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었죠.
하지만 딸은 잔디 위에 발을 디디자마자 ‘찡찡’ 울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낯설어서 그렇겠지, 조금 지나면 괜찮을 거야’라며 가볍게 생각했지만,
그 ‘찡찡’ 거림은 점차 ‘으앙~’ 하는 울음소리로 커졌고,
딸은 발을 쳐들며 저에게 안아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때 저는 단순히 잔디의 촉감이 신기하고 무서워서 우는 줄만 알았습니다.
양말조차 신기지 않았던 그 맨발이 아이에게 얼마나 힘들고 아팠는지,
당시엔 알지 못했죠.
그저 ‘맨발로 잔디를 밟는 게 좋다’는 피상적인 정보만 있었을 뿐,
아이 입장에서 깊이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날의 딸아이 표정과 발을 쳐들던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가늘고 예민한 아기 피부에 닿은 까끌까끌한 잔디…
그 작은 발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난생처음 땅을 밟는 그 순간이
얼마나 낯설고 두려웠을지,
돌이켜 생각할수록 가슴이 저려옵니다.
뒤늦은 후회와 미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1. 부모의 ‘맹점’
나를 투영한 비자발적 아픔의 전달
육아는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부모 의도와 상관없이
아이에게 아픔을 주기도 하는 ‘맹점’이 존재하곤 합니다.
우리는 흔히 아이에게 ‘최고의 것’을 주고 싶어 하지만,
그 ‘최고의 것’이 아이의 관점이 아닌,
부모 자신의 경험이나 사회적 통념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부모의 투영(Parental Projection)’이라고 합니다.
아이의 감각이나 경험을 섬세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괜찮았으니 아이도 괜찮을 거야’ 하는 무의식적 전제를 하는 것이죠.
저 역시 ‘아이들은 맨발로 자연을 느끼며 자라야 한다’는 외부 정보나
제가 겪었거나 겪지 못했던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딸에게 적용했는지 모릅니다.
그 어린 발의 감각이 어른 발과 얼마나 다른지,
잔디의 까끌함이 아기에게 어떤 고통인지 헤아리지 못했던 무지가
결국 딸의 아픔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부모로서 저의 커다란 맹점이었죠.
2. ‘뒤늦은’ 공감
죄책감으로 피어나는 회복적 이해
시간이 흐르고, 저도 한 뼘 더 자라며
딸아이 그때 그 감각을 비로소 상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엔 ‘아이가 잔디가 싫은가 보다’라고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 그건 잔디가 싫은 게 아니라 너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던 거구나’ 깨닫게 된 것이죠.
이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밀려오는 감정은 죄책감입니다.
하지만 이 죄책감은 단순한 자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심리학에서 부모의 ‘회고적 공감(Retrospective Empathy)’은 매우 중요합니다.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고,
아이가 느꼈을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부모가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고
더욱 성숙한 양육자로 성장하는 디딤돌이 됩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제라도 깨달았다는 사실 자체가
부모로서 사랑과 이해의 깊이가 더해졌다는 증거입니다.
미안함은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3. ‘연결’의 힘
부모의 삶을 통해 자녀를, 자녀를 통해 과거의 나를 보다
아마도 저 역시 부모님의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몰라서, 때로는 불가피하게
저에게 닥쳤던 이해 못 할 순간들이 많았겠지요.
그리고 이제 제가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그와 같은 경험을 시키거나
과거 제 부모님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이것은 ‘경험의 전이(Experiential Transference)’이며, 세대를 잇는 깊은 이해의 여정입니다.
딸을 통해 제 과거의 미안함을 마주했고,
또한 저를 돌아보고 부모님을 더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딸의 고사리발을 통해 저의 과거, 저의 부모님 마음까지 읽게 된 것이죠
이처럼 우리는 자녀를 양육하며
스스로를 성찰하고,
부모님과 화해하며,
내 안에 머무는 어린아이와 함께 성장합니다.
딸아이의 작고 여린 발에서 시작된 미안함은,
단순한 후회를 넘어
저를 성장시키는 사랑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자신의 미숙함을 마주하며 성장하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걸 알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아이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딸에게 더 깊고 섬세한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날의 고사리발이 전해준 아픔은
이제 제 마음속에서
더 깊은 사랑을 가리키는 소중한 지표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