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지내기 쉽겠지만 덴마크 역시 엄연히 군주정 체제를 유지하는 나라 중 하나다. 다시 말해 덴마크 왕실이 여전히 공식적으로 남아 있고, 지금도 왕실은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히 궁궐은 문화유산으로 간주되기 이전에 왕실의 재산 및 별장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코펜하겐에는 궁전이 세 곳 있는데, 바로 크리스티안보르와 아밀리엔보르, 그리고 로젠보르 궁전이다. 그 중 아밀리엔보르는 덴마크 왕실 가족들이 실제 거주하는 공간이고, 나머지 둘은 필요시에 사용하는 일종의 별장인가 싶었다. 특히 크리스티안보르는 입법부와 사법부까지 모두 갖춘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꽤 높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곳이 관광객에게 공개된 공간이자 왕실의 재산임을 짐작할 수 있었던 지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관람객이 입장할 때 신발을 비닐로 싼 상태에서 들어가도록 한 점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많은 의자가 있었음에도 관람객이 실질적으로 앉아서 쉬는 데 사용되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쉴 공간을 찾는 데 애를 먹었고, 그 지점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러한 아쉬움과는 별도로 스웨덴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 기마 초상화와, 유럽의 수많은 나라가 하나의 집안이었음을 생각하게 만든 작품을 볼 수 있었던 점이 가장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는 왕실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 3일차 아침에 나는 아밀리엔보르로 갔다. 매일 정오마다 근위대 교대식이 열린다고 해서 그것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날 내가 아밀리엔보르에 도착하였을 때 그날 마라톤 축제가 열렸음을 뒤늦게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 나는 써머타임 기간이라서 축제가 일찍 시작되었을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끝날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축제는 정오가 지났음에도 끝나지 않았고, 근위대의 교대 행사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서 약식으로 치러졌다. 이날 담은 사진들을 뮌헨에 있을 때 한 번 더 꺼낼 기회가 있었다. 같은 호실을 쓰는 사람들 중 덴마크에서 온 나타샤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내가 사진을 보여주며 무슨 풍경인지 알아보겠냐고 물었다. 나타샤는 나의 질문에 왕실이 주관하는 마라톤 축제가 있었고, 덴마크에서는 꽤 유명하고 큰 축제란다. 그리고 지금의 황태자가 시민들 사이에서는 꽤 인기가 높다는 것도 말해주었다.
근위대 교대식 관람이 물거품이 된 후 찾았던 곳은 카스텔레 요새였고, 별로 기대하지 않고 갔음에도 충분히 흥미로운 공간이었다. 이 요새는 17세기부터 제 2차 세계대전까지 군사적인 목적에 따라 사용된 공간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곳은 민간이 아닌 군대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요새를 돌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 중 하나는 지금도 이 건물이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흔적이었다. 지금까지 답사를 다니면서 텅 비어 있거나 박물관 등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빈 고택을 위주로 돌아보았던 나는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였다. 그렇지만 가는 곳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심지어 어떤 곳은 버티컬로 가려져 있었다. 군대의 관리를 받는 곳이니 아마 병사나 간부 전용 숙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문득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만약 국내에서 근대 이전에 사용된 건물들이 특수한 목적으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하면 어떤 느낌일까? 유네스코에 등재된 창덕궁의 부속건물 중 낙선재가 그러한 선례를 남겼던 대표적인 공간이지만, 주요 왕실 인물들이 세상을 떠난 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으니, 지금 그 의미를 음미한다는 자체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전쟁박물관 등에서 한 번씩 눈에 보였던 청동 대포는 그만큼 덴마크의 지하자원 조건이 좋지 않음을 생각해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흔히 사람들의 뇌리에 대포의 재질이라고 하면 철로 만들어진 검은색의 그것을 떠올리기 쉬울 것이고, 철제 대포가 청동보다 성능이 좋은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고금을 막론하고 사격 직후 과열된 포신을 식히는 것이 운용에서는 핵심이고 철제 대포가 그런 점에 잘 부합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하자원이 많지 않은 나라들에게는 무기의 주 재료인 철을 구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성능이 낮더라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하거나 합금을 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를 상기해 내니 청동 대포가 전시된 모습이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카스텔레 요새에서 주목할 만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순국한 군인들을 위한 추모 공간이었다. 카스텔레 요새의 반대편 출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덴마크 군대가 파견되었던 나라와 함께 순국한 군인들의 이름이 파견지 및 생몰년도와 함께 새겨져 있었다. 이 전시물을 보면서 나는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들었다. 과연 덴마크 정부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험지에 자국의 군대를 보냈을까? 당연히 공식적으로는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겠지만, 만약 무언가가 더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것과는 별도로 이역만리로 파견된 덴마크 군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더 나아가서는 그들이 그 당시에 전장에서 마주하였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카스텔레 요새 내부와는 별도로 이바르 후이트펠트 기념탑도 보았는데, 이곳은 인어공주 동상과 지척이었다. 멀리서 탑의 윗부분을 볼 때는 잘 몰랐는데, 막상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주 재료로 청동 대포의 포신 몇 개가 재료로 쓰인 모습이 보였다. 이 탑은 북방전쟁에서 전사한 제독과 군인들을 기리는 조형이라는데, 무기를 기념물의 재료로 사용한 점이 어색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전쟁은 무엇이고 무기란 무엇일까? 사진을 통해 다시 보니 지금도 궁금증이 잔잔하게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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