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시작되는 6월 초에 판다와 함께 지리산을 가기로 했다.
지리산은 대한민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산이다. 지리산에는 가장 높은 천왕봉이 있고 철쭉이 아름답게 피는 바래봉, 접근성이 좋은 노고단과 반야봉 등 훌륭한 산세를 자랑하는 여러 봉우리가 모여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산이다.
"판다는 곰이지? 우리 지리산의 반달가슴곰 보러 갈까?"
판다는 친구 만나러 간다고 좋아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곰을 만난다면 무서워서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긴 등산을 위해 안내버스를 타고 지리산으로 밤에 출발을 했다. 6월 초였지만 낮기온이 27도까지 오르는 날씨라 반팔차림으로 집을 나섰는데 아뿔싸...
추운데?
20여 명을 태운 버스는 경남 산청의 거림마을에 등산객을 내려주었다. 시간은 새벽 3시 40분이었다. 하지가 가까워 오는 6월 초의 일출시간은 5시 15분이었다. 1시간 반 후면 일출이 시작이다. 그래서 일출을 보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천천히 등산을 하기로 했다. 버스에 내린 사람들은 줄을 서서 지리산을 향해갔다. 등산로 초입을 지나가는데 벌써부터 하늘이 밝아져오고 있었다. 준비해 간 헤드렌턴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어둠은 천천히 걷히고 있었고 돌로 잘 다져진 등산로 옆으로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다. 새벽 어스름에 들러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길 옆으로는 대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게 보였다. 판다가 좋아할 만한 곳이라 생각이 든다. 1시간가량을 걸어 올라가니 이정표에는 세석대피소까지 2km가량 남았다고 안내해 준다. 이제는 날이 밝아지고 해가 뜨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은 산의 골짜기라 풍경을 볼 수 없고 초록색의 이끼와 나무들을 보며 계속 걸어갔다. 해발 1300미터쯤 되면서 기온이 내려가는 게 느껴졌고 많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산은 지상보다는 온도가 낮은데, 보통 1000미터당 6도에서 7도 정도 낮아진다 한다. 그래도 오늘 낮기온이 상당히 높은데 이상할 만큼 온도가 낮았다. 가지고 있는 온도계를 확인하니 9도였다. 지금 입고 있는 반팔로는 추워서 예비로 가지도 다니는 바람막이 점퍼를 꺼내서 입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반팔, 반바지 차림의 사람들도 보였는데 괜찮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판다도 곰
한참을 걷다 보니 플래카드가 보였다. "반달가슴곰 출현주의"였다. "우리 지역에 반달가슴곰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가슴팍에 잠자고 있던 판다를 깨워서 보여주었다.
"판다도 곰이야"
지리산의 마스코트인 반달가슴곰은 등산 중에 종종 목격이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플래카드에 경고까지 있는 걸 보니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등산을 이어갔다. 곰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무 위로 도망가야 하나? 곰은 나무를 잘 타던데... 죽은 척해야 하나? 진짜로 죽겠는데... 곰은 금속성 소리를 싫어한다는데 금속성 소리를 낼만 한 게 없는데, 쇠 긁는 목소리를 내야 하나? 별 쓰잘대기 없는 고민을 하면서 판다에게 "판다는 곰과 친하다고 하니 곰을 만나면 판다를 내려놓고 도망가야겠다"라고 하니 판다는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고 나에게 안심을 시켜주며 농담을 받아주었다.
세석평전
예쁜 숲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세석대피소에 거의 도착을 했고 "식수장" 안내표지판이 보였다. 이곳에서 졸졸졸 흘러나오는 물을 한입 마시고 세석대피소로 올라갔다. 세석대피소는 취사장이 있어서 고기를 굽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 취사장 안에는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고 나의 식욕을 돋아주었다. 아침식사로 챙겨 온 주먹밥 두 개를 꺼내서 맛있는 냄새를 반찬삼아 천천히 먹었다. 시간은 새벽 6시 20분, 평소 같으면 아직도 꿈나라에 있을 시간인데 지리산은 나를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세석대피소에서 나와서 촛대봉을 향해 걸어갔다. 세석대피소 부근은 세석평전이라 불리는 곳인데, 잘 발달된 습지도 볼 수 있었다. 안내판에는 습지에 사는 다양한 식물들에 대해서 안내가 되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양한 식물군을 볼 수 있었다. 이 습지의 물은 지리산의 야생동물들도 마시고, 아래로 흘러서 아까 있던 식수장까지 이어져 등산으로 지친 우리들에게까지 물이 제공되는 것 같았다. 이런 식물들이 걸러준 깨끗한 물을 마셔서 몸도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세석평전을 조금 더 걸어가면 촛대봉이 나왔고 촛대봉에서 바라본 산세는 수묵화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굽이굽이 산의 능선들이 하나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졌다.
연화선경
촛대봉을 내려가며 연하봉으로 발길을 이어갔다. 촛대봉과 연하봉 사이에는 지리산 10경 중에 하나인 연하선경이 나오는데 이름처럼 너무나 멋진 곳이었다. 말 그대로 신선이 안개와 노을을 감상할 만큼 멋진 경치를 보여주었다. 촛대봉과 연하봉 사이에 이어지는 능선길을, 새벽에 안개가 지나갔을 것이고, 저녁에는 노을을 받으며 붉게 빛나리라 상상이 해보았다. 신선이 놀았을 멋진 길을 천천히 걸으며 신선이 된 기분을 느껴보았다. 잘 다져진 돌길을 걸으며 멀리 보이는 연하봉을 별자리 삼아서 항해하듯 나아갔다. 때때로 제법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걸음을 이어갔고, 어느덧 연하봉을 넘어갔다.
8시 30분, 장터목대피소에 도착을 했다. 장터목대피소는 1750미터에 자리 잡은 한국에서 가장 높은 대피소이다. 그래서 장터목대피소를 '하늘 아래 첫 집'이라고 부른다. 장터목대피소에는 세석대피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바람을 피해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 잠시 쉬면서 준비해 온 초콜릿을 먹었다. 온도계를 보니 7도까지 내려간 상태였다. 바람도 많이 불어서 체감온도는 더 낮았다. 이제 1.7km만 더 가면 천왕봉이다. 대피소에서 잠깐 쉬고는 바로 천왕봉으로 향했다.
천왕봉을 가기 전에 제석봉을 만났다. 판다가 갑자기 빵 터져서 웃는다. '판다야, 재석봉이 아니라 제석봉이야' 판다는 국민 MC가 떠올랐나 보다. 나는 엉뚱한 판다를 이해해려고 노력했다. 제석봉에는 삐쭉삐쭉한 고사목들이 앙상한 가지를 뻗으며 서있었다. 겨울에는 멋진 설경을 보여준다고 한다. 바람을 맞으며 낮게 자라는 나무에 상고대가 피면 정말 멋있는 모습을 보여줄 것 같았다. 제석봉에서 눈을 돌려 바라본 천왕봉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눈을 반대로 돌려보니 걸어왔단 연하봉과 더 멀리 반야봉을 볼 수 있었다.
이제부터 정말 힘들었다. 이미 많이 걸어온 데다 돌길과 계단은 끝도 없이 나타났다. 그래도 멋진 풍경을 보며 나아갔다. 천왕봉이 다 왔음을 알리는 통천문을 지났다. 하늘로 통하는 문을 지나면 이제 천왕봉에 도착을 한다. 좁은 돌틈 사이를 지나고 마지막 계단까지 밟고 나서야 천왕봉에 도착을 할 수 있었다.
천왕봉
천왕봉은 넓고 평평하게 다져진 공간 위로 크게 올라가 있었다.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 넓은 휴식공간을 마련해 둔 것 같다. 천왕봉 정상석 부근에는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나는 지리산의 주봉이자 백두대간을 이어주는 천왕봉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주변의 산들을 바라보니, 다음에는 이곳에서 일출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솟아났다. 그리곤 우리가 왔던 길을 바라보았다. 예상과 다르게 추웠던 날씨였고, 긴 등산길이라 힘들었지만 정상에 서면 고생했던 것들을 다 잊고 좋은 것만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 판다와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은 후, 아래로 내려와서 넓은 휴식공간에서 잠시 쉬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휴식을 하고 있었다. 천왕봉에서 짧은 휴식을 하고 중산리 방향으로 하산을 했다. 이미 많이 지쳐있어서 하산은 특히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내디뎠다. 하산을 할 때 많이 미끄러지는데 오늘같이 체력을 많이 소진한 날은 발을 접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안내버스가 기다리는 중산리탐방지원센터까지 안전하게 내려왔고 오랫동안 눈에 담고 싶던 풍경들을 뒤로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지리산 천왕봉, 21.3km, 10시간 14분, 소모칼로리 4603kcal, 평균경사도 16%
상승고도 1667m, 하강고도 1794m, 최저높이 479m, 최고높이 1917m
산타는판다의 일기
와아아아아아아아!!!!!!!!
여기는 지리산이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천왕봉이다아아아아아아아아!!!!
백록담 다음으로 높은 곳이야!!!!!
주변 산봉우리를 아래로 내려보다니!!! 너무 자랑스럽다앙아
여기 곰 산다고? 곰 조심하라는데 판다는 괜찮아! 친구자나!!
정상 가는길목에 연하선경은 너무 멋져서 힘든걸 잊게 해준다!! 능선은 어느산이고 다 멋져!!!!
이제 조심조심 네발에 힘주고 내려가야해!!!!
또 보자 지리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