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한번 좋아해 볼 수 없을까? “

05. *약간의 폭력 묘사가 있음.

by Da테



그와 이별한 후, COVID-19로 입국이 제한되어 나는 한국에 덩그러니 남아 있게 되었다. 이별의 원인이었던 출국이 (당시에는 사실상 무기한으로) 연장된 것이다. 나는 여러 번 주저하다가 그에게 연락을 해 보았다. 메시지가 닿을 리는 만무했다. 그는 완전히 결심하고 모든 연락을 끊었으니까. 앞으로도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올 일이 없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나는 부인과 분노를 넘어, 자포자기했다.


자포자기 한 김에, 그것으로 득을 보기로 했다.

분당소망을 실천하기 위해 여러 사람과의 교제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니, 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나는 그런 생각으로 좌절된 관계에 대한 분노를 잠재웠다. 안전과 관련된 위험 요소는 일절 고려하지 않았다. 마치 ‘알았어. 역시 난 당신에게 지켜져야 할 존재가 아니야. 확인시켜줘서 참 고맙군!‘ 하고 허공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그때만큼은 머릿속 B사감도 조용해졌다. 나는 내 몸을 던져 내면의 보호자였던 B사감과 옛 애인에게 마음껏 반항하는 기분이었고, 그것이 마냥 울적하지는 않았다.


애인 따위는 필요 없었다. 당분간은. 그저 나의 호기심을 근사하게 총족 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았고, 나는 그러한 상대를 되도록 빨리 찾아내고 싶었다. 언제 일본으로 떠나야 할지 몰랐으니까. 이건 이성과 판단력의 마비에 의한 결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동시에 여러 사람과 파트너를 맺을 가능성에 대해 따지려면 적극성과 처세술, 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기술이 필요했다.


남성과의 교제가 자신에게 미칠 잠정적인 굴욕을 걱정하면서 여성의 발치를 찾아 떠났다는 사실은 무모한 언어도단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난 남성들을 먼저 만났다. 그 편이 간편하고 빨랐으니까. 패스트푸드처럼. 그런데 젠장, 돈은 내가 돌려받아야 할 판이었다! 남녀 간의 성적 교환에 깔린 대전제를 불운한 방식으로 깨달은 기분이었다.


(돈을 받았냐고? 내지도 않았고, 받지도 않았다. 내가 들인 노동을 생각하면 받았어야 하는데! 그랬다간 나 자신의 인격이 부정당하고 정상 사회에 다신 발을 못 붙이게 되는 건 아니냐고? 아, 굉장히 잘 붙어 있는데? 정상성 수행은 내 몸을 파는 횟수와 상관없이 하도록 강제된 것 아니던가? 몸이 여성이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믿는 건, 남성이 자신의 무릎에 어떠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빌어먹게 순진한 생각이다. 너넨 쥐뿔도 없는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진짜 마지막이 뭔 줄 모르지?)


아무튼, 내가 남성 그 자체가 아니라 남성성에 강렬히 끌린다는 사실을 나는 조금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예수님의 세 개의 신체 기관에 한 글자의 무언가가 박히는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볼 때 내가 느낀 고통과 가학심이 내 성향을 설명하고 있다고 섣불리 진단해서는 안되었다. ‘트라우마의 페티시화’라는 이름의 그 기발한 함수 변환을 나의 천성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나는 어리고 행동력도 있었으니 결국은 … 내가 사실은 남자를 쥐어 패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물리적으로.


까짓 거 한번 해 보지 뭐.

내가 쳐 맞는 것도 아닌데 큰 손해는 아니잖아?




남성과 교제하는 것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내게 별 다른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나는 투우사 같은 남성성과 관능미 넘치는 육체에 대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글을 쓰는 것과, 내가 그 관계에 개입하여 성적 실천을 하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글을 쓰면 쓸수록, 남성과 만족스러운 성적 관계를 맺기 위한 최소 총족 요건은 다름 아닌 남성기라는 확신이 강해졌다. 나의 몸으로는 도무지 남성과의 관계를 통한 성적 해방과 그 이후 따위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이나 외견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그때그때 만날 수 있는 서브미시브적인 성향을 가진 남성들과 교제했다. 일러두지만, 성관계는 일체 맺지 않았다. 사실 난 양말 한 짝도 벗을 필요 없었다. 성관계에 정말 아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성들 대부분은 나와 교제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나 또한 그들이 소중하지 않았다. 죄책감 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밟고,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었다. 그런 뒤에는 농담을 주고받고, 함께 저녁을 먹고, 이따금 외출에 동행했다.


그러나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난 그 원인을 지식의 부재로 여겼다. SM의 실천에 대한 문헌들을 찾아 읽고(당시의 탐구가 현재의 일탈적 성애와 규범의 전복 가능성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적극적으로 이용했으며 관련 물품들도 사 들였다. 파트너들 중 한 명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책을 읽고, 그들의 집에 방문하고, 이따금 성향자들의 모임에 참여했다. 오로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정적인 전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때마다 건성으로 책을 읽거나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지만 내가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들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망설임이 없다는 것이, 무신경하고 잔인하다는 것이 이 세계에서는 재능이었다. 이것으로 장래를 계획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것에도 곧 질려 버렸다. 지쳐 버렸던 것인지, 질려 버렸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따분하기만 했다. 곧 맺고 있던 관계를 끊고 커뮤니티도 모조리 탈퇴했다.


곧 성인이 되었다. 새로운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다. 여성이었다. 자신을 사디스트이자 돔으로 소개했다. 연락을 주고받던 중 면접을 겸한 전화 통화가 걸려왔다. 그는 내게 이것저것을 물어보더니, 내가 서브미시브로서의 경험이 없고 오히려 그 반대의 실적을 쌓아왔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신경질적이고 짓궂은 상사처럼 돌변했다. '뭐야. 그럼 왜 연락을 한 거야?' 정곡을 찔린 나는 땅바닥만 바라보면서 침묵을 지켰다. 하나 떠오른 이유가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고 싶지는 않았다.




실제로 만난 그의 첫인상은 꼭 자신의 불행을 사랑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재즈 가수 같았다. 대충 P라고 부르자. 한눈에 P가 나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인간임을 직감했다. 억척스럽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진심으로 분개할 줄 아는 제멋대로인 아이 같은 열정이 있었다. P는 단신 단발에, 눈은 고양잇과 동물처럼 커다랗고 입술은 고집스러워 보였다. 즉흥적이며 야성적이었고, 길들여지지 않은 애정과 말을 거침없이 퍼부었다. 웃을 때는 고개를 젖히며 깔깔거렸고, 천박하게 사고하고 말하는데 진정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결점을 숨기지 않았다. 자기가 가진 것 전부를 보여줄 테니, 그것을 알아서 솎아내 견뎌내라는 식이었다.


그는 또래이면서도 지극히 염세적인 나를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어 했다. “난 네가 마음에 들어.” 그는 유난히 진한 눈매를 빛내며 속삭였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다가 갑자기 뜨면, 너는 어김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거든.”


모텔 방에 들어와 막 샤워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그가 나를 멈춰 세웠다. “이거 마셔.” 그의 손에는 자신이 입을 헹구었을 구강 청결제가 들려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집어 전부 들이켰다. 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야, 그걸 진짜 마신다고? “


“시키셨잖아요.”


그가 이를 드러내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너 진짜 이상한 애야. 알아?”


P가 처음 내 뺨을 때렸을 때가 기억이 난다. 바로 그때, 비록 합의를 하긴 했지만 이게 무슨 종류의 업보 청산인가 싶어 곧바로 난감해졌다. 내가 어쩌다가 원수에게 오른뺨을 맞았으면 왼 뺨도 내밀어주라는 규율을 여기서 실천하고 있을까? 어라, 왼 뺨이 아니라 오른뺨이던가? 아, 그래. 이런 짓을 하면 그 사람이 싫어할 텐데. 그 사람이 끔찍하게 아꼈던 몸을,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멋대로 처분 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가 손을 치켜올리자 익숙한 공포심과 이상야릇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어쩐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 한번 터진 웃음을 거두기가 어려웠다. 내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하자 그는 기쁨인지 분노인지 모를 표정으로 손을 정지한 채로 두었다.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나는 조그맣게 사과를 했다. 그 뒤로 나는 웃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난 그에게 곧바로 첫 경험까지 넘겨주었는데 어떤 형태로든 합의 없이 벌어진 자신의 최초보다는 덜 흉측 하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예정에도 없이 처음 만난 모텔에서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황금색 색종이를 따로 오려 붙인 듯한 선명하고 큰 두 눈동자가 나를 맞이했다. P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수상할 정도로 느리게 피어올라 내리쬐는 햇살과 흰 벽지와 어지럽게 섞이고 있었다. ‘널 한번 좋아해 볼 수 없을까?.‘ 나는 속으로 묻고는 이내 답했다.


’아니, 충분해. 사랑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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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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