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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비처럼 H의 피부에 내렸다

말은 짧았고, 감각은 오래 남았다

어느 비 오는 수요일 오후,

H의 핸드폰에 통화음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H는 낯선 숫자에 닿는 순간

손끝이 얼어붙는 사람이다.


그날도 그랬어야 했는데..

그날은,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 소리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전자음의 떨림이

몸 안에서 어긋났다.

몇 초 뒤

모니터에 조용히 알림이 떴다.

“여행 갔어요?”

그 문장은

H의 손목을 감싼 은색 시계처럼 차가운 질감을 가지고 있었고,

마른 벽지를 긁는 손톱 같은 울림을 남겼다.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엔

무언가 부서졌다는 사실을 감춘 사람의 태연함이 박혀 있었다.

H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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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엔 빗소리가 퍼지고 있었고,

커튼은 반쯤 드리워져

회색 공기가 천천히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그는 오래전에 떠났다.

떠났다는 말이 정확한지도 모르겠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H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남은 건

“잘 지내요?”라는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거슬리는 문장 하나.

H는 그저 읽었다.

발음도 없고 체온도 없이,

그 문장만

방 안을 맴돌았다.

어떤 소리들은

심장보다 피부에 먼저 남는다.

그날의 비처럼.




이 글은 오래전 감정이 감각으로 돌아오는 순간에 대한 짧은 기록입니다.


감정은 지나가지 않고,

가끔은 비처럼 다시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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