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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 Out (2017, Jordan Peele)

통제의 의례 (The Ritual of Control)

제2막 – 겟 아웃 (Get Out, 2017, Jordan Peele)


통제의 의례 (The Ritual of Control)


엑소시스트의 공포가 믿음의 대체라면, 영화〈겟 아웃〉의 일상은 위장된 통제이다.

이 영화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 집의 거실을 처음 보았을 때, 그곳의 공기가 아주 은밀히 조작되어 있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엑소시즘은 사제에 의해 행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화목한 백인 중년 부부와 그들의 딸이 집안에서 수행하는 일상이었다. 그들은 미소를 짓고, 차를 우려내며, 손님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은 하나의 의례적 스크립트처럼 정교하게 짜여 있었다. 빛이 과도하게 하얗게 번져 있고, 공기는 냄새 없이 멸균되어 있으며, 음악은 마치 심장박동을 재조정하듯 부드럽게 반복된다. 그 안에서 흑인의 몸은 객체로 환원된다. 환영받기 위해 초대되었으나, 사실은 관찰되고 해체되기 위한 재료로. 이 집의 정중한 친절은 신성 모독보다 더 완벽한 폭력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가장 은밀한 의례를 통해 자아를 침식하기 시작한다.


When horror learns to smile, control becomes a ritual.





II. Hypnosis – The Silent Descent (최면: 침묵 속의 낙하)


장면은 전환되었다. 꽃무늬가 수놓인 찻잔 안에서 숟가락은 달그락거린다. 그것은 멈추지 않는 팽이처럼 남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이것은 단순한 최면 유도가 아니다. 의례가 요구하는 규율이다. 숟가락이 만들어낸 검은 소용돌이 안으로 그의 정신은 빨려 들어간다. 공포는 이제 소리라는 매개체로 존재한다. 금속과 도자기의 부딪힘이 주문처럼 울리고, 그 단조로운 리듬이 그의 의식을 점점 분리시킨다. 규칙적인 소음은 외부 세계의 모든 의미를 지워버리고, 오직 하나의 명령만이 남을 공간을 창조한다. 이 장면의 잔혹함은 폭력의 부재에 있다—피도, 고함도 없다. 오직 차가운 조명과 느린 줌, 그리고 완벽히 제어된 여성의 목소리만이 남는다. 그녀-어머니는 마치 사제처럼 속삭인다.

"Sink into the floor."


그 명령은 구마의 반대편, 즉 자아의 추방을 향한 기도다. 여성의 목소리는 애정과 친절을 위장한 언어 폭력이다. 그녀의 '규칙적인 속삭임'은 트라우마가 언어의 형태로 반복될 때 정신을 파괴하는 방식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녀의 말은 남자의 자아를 보호하는 내면의 경계를 해제하는 치명적인 코드이다. 그는 떨어진다. 심연 속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녹아내리는 그곳으로. 그는 악령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다. 그는 통제에 흡수되었다. 찻잔이 십자가를 대체했지만, 그 의례는 변함없이 남았다. 숟가락의 달그락거림은 구원의 율법이 아닌, 존재의 해체 명령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파열음이다. .



He is not possessed by evil; absorbed by control. The cup replaces the cross. The ritual remains




III. The Sunken Place — 침몰하는 의식


그는 이제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다. 눈꺼풀은 무겁게 닫히고, 빛은 한 점의 먼지처럼 멀어진다. 시선은 가라앉고, 청각은 내면으로 뒤집힌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는다—그 깊이는 수직이 아니라, 자아의 경계가 해체되는 내면의 원형이다. 그곳은 아무 소리도 없다. 위와 아래의 구분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눈만이 무한한 어둠 속을 떠돈다. 몸은 의자에 남고, 의식은 그 아래의 무한한 암흑 속으로 떠밀려 간다. 이것은 잠이 아니다. 이것은 파문(Excommunication)이다. 자신의 몸으로부터 추방당한 의식, 육체의 영구적인 망명이다. '썬큰 플레이스'는 지옥이 아니다. 그곳은 오히려 신성이 부재함을 완벽하게 닮은 공간이다. 모든 소리, 모든 의미, 모든 색이 빠져나간 자리이다. 그곳은 영혼의 무균실이며, , 고통조차 허락되지 않음으로써 자아의 마지막 저항마저 박탈당한 절대적 고요만이 존재한다.



찻잔 위에서는 여전히 숟가락이 달그락거리고, 그 단조로운 소리가 얇은 필름처럼 그의 무력한 의식을 영원히 구속한다. 몸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타인의 코드에 맞춰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그의 정신은 스크린 아래의 또 다른 스크린 속에서, 자신이 타인의 의지로 연기되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는 외부의 시선에 의해 영원히 재생되는, 자기 자신이라는 영화를 끊임없이 관람하는 고문이다. 공포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악'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라는 영원한 시선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된다. 그는 이제 하나의 성상이 되었다—타인의 욕망에 의해 조각된 인간의 얼굴, 그 자체로 신성 모독의 예술품이다. 그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의한 영구적인 관찰 속으로 침몰한다. 신성한 부재가 이제 미소를 띠는 가면을 쓰고, 공허가 육화되어 타인의 의지로 영원히 살아가는 곳.

이것이 〈겟 아웃〉의 가장 잔혹한 내면의 종교적 체험이다.


He sinks, not into darkness, but into obser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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