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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시스트(1973): 공포의 경전

Faith, Blasphemy, and the Empty Altar

공포의 경전 (The Liturgy of Terror)

믿음, 신성 모독, 그리고 성스러움의 심리에 대한 3부작


꿈작업에 이은 3부작의 흐름은 세 편의 영화를 관통하며, 공포는 성스러운 것의 침입(엑소시스트) → 저주와 의례의 유전(유전) → 믿음 속에서의 자아의 황홀한 소멸(세인트 모드)로 진화한다.

열네 살에 그녀는 공포가 감정이 아닌 의례임을 배운다. 《엑소시스트》는 공포의 첫 번째 의례로 읽힌다. 믿음이 그 자체의 상징 아래서 경련하고, 십자가는 은총에서 폭력으로 변모하며, 악마의 찰나적인 얼굴은 영화의 부정적인 성상(negative icon), 즉 결코 보아서는 안 될 이미지로 기능한다. 이 영화는 성스러움이 어떻게 내파(implosion)되는지, 공포가 악마의 현존이 아니라 뒤틀린 공백으로부터 어떻게 스며 나오는지에 대한 상징으로 기능한다.




제1막 – 엑소시스트 (The Exorcist, 1973, William Friedkin)

성스러운 것의 모독 (The desecration of the sacred)


At fourteen, she first understood terror not as spectacle, but as intrusion


At fourteen, I first understood the liturgy of terror. It was not the spectacle of the film, but its intrusion: the crucifix, the fleeting demon’s face in the dark, the way a nightmare can seep into the real world. I felt both humiliation and awe: my childhood faith convulsing under sacrilege, yet I was magnetized by the film’s true horror, the intrusion into the psyche. The nightmare that cannot be seen fully yet cannot be forgotten.

(이 문단은 제가 작성한 horror fiction의 첫 문단입니다. 아래는 원본을 최대한 살린 번역입니다.)


14살에 나는 공포의 성찬을 처음 이해했다. 그것은 영화의 스펙터클이 아닌 침입이었다. 십자가, 스크린에 문득 스치는 악마의 얼굴, 악몽이 깨어 있는 현실로 스며드는 방식. 크리스천 여중생으로서 나는 굴욕감과 동시에 경외감을 느꼈다. 유년의 믿음은 신성 모독 아래서 경련했고, 동시에 영화의 진정한 공포, 정신을 향한 그 침범에 매혹되었다.

완전히 보여지지 않았기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악몽이었다.


그날 이후, 공포는 얇고 예리한 의식이 되었다. 그것은 가슴이 내려앉는 불안이 아니라, 시스템의 오류를 알리는 미세한 진동이었다. 십자가는 더 이상 구원의 기하학이 아니었다.


공포는 늘 ‘침입’의 형태로 다가왔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현듯 화면을 스치는 악마의 얼굴처럼, 그것은 현실의 두터운 장벽을 박살 내고 들어오는 폭력이었다. 그러나 그 폭력은 악마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뒤틀린 오해: 믿음의 부재라는 고통스러운 자각으로부터 흘러나온 공백이었다.


H는 이 침입에 굴욕감과 동시에 매혹을 느꼈다. 굴욕감은 내 순수한 믿음이 더럽혀졌다는 자각에서 왔고, 매혹은 공포가 신앙의 영역과 얼마나 가까이 맞닿아 있는지에 대한 섬뜩한 통찰에서 기원한다. 악몽은 완전히 보이지 않아야 잊힐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꿈이 현실로 스며드는 방식을 가르쳐주었고, 내 무의식 깊은 곳에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의 부정적인 성상을 영원히 각인했다. 공포는 이제 그녀의 신학의 일종이다. 그녀는 그 서늘한 의식을 꿈속에서 수행하는 신도가 되어, 공포가 어떻게 성스러움의 내부를 침범하는지 목도한다.



I. 침범 (The Intrusion)


그 장면은 여전히 내 시야 어딘가에서 꿈틀거린다.


십자가는 더 이상 구원의 상징이 아니었다. 악마의 손이 아닌 인간의 손에 쥐어졌을 때, 그것은 성스러운 의식이 아닌 폭력이 되었다.

소녀의 방에서 행해지는 십자가 신은 단순한 신성 모독을 초월한다. 그것은 믿음의 내부가 파열하는 순간이다. 몸은 찢어지고, 피가 흩뿌려지며, 혀 끝은 신성 모독의 음절로 뒤섞인다. 그 모독은 단순한 불쾌함을 넘어, 내 안에 있던 믿음이 물리적으로 경련하는 느낌이었다. 타르코프스키의 물이 인간의 얼굴을 서서히 비추었다면, 프리드킨의 십자가는 그 얼굴을 갈가리 찢는다. ‘성스러운 상징’이 더 이상 믿음을 지탱할 수 없을 때, 그 껍데기는 오직 공포로 채워진다.

When faith tears its own flesh, the cross becomes a weapon



II. 찰나의 악마 (The Fleeting Demon)


그리고 갑자기 화면을 스쳤던 악마의 얼굴. 창백하게 스쳐가는 형상은 단 하나의 프레임이었다. 그것은 서사적 인물이 아니라, 시각적 규율에 대한 기술적 위반이었다. 또한 상영 도중 필름에 새겨진 단 한 번의 오작동, 현실의 둔탁한 장벽에 새겨진 치명적인 흠집이었다.


나는 그 한 번의 섬광 속에서 공포의 본질을 학습했다. 공포는 보는 것이 아니라, 보았다고 믿는 것이었다. 그 찰나의 잔상은 스크린을 넘어 내 안의 어둠 속으로 침투했고,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결코 보여서는 안 될 것'의 부정적인 성상을 영구적으로 각인했다.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눈과 뇌 사이에 새겨진 기생체에 가까웠다. 이 바이러스는 인간 정신의 운영 체제(Operating System)를 감염시켜, 믿음의 메커니즘 자체를 악용한다.


'신은 보이지 않는다'는 교리 속에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능력(faith)으로 구원을 갈망한다. 그러나 이 악마는 그 믿음의 영역으로 침투하여, 보이지 않았으나, 보았다고 강하게 믿어지는 것(terror)을 심어버린다.

이 짧은 프레임의 악마는 단순한 영화적 악당이 아니라, 존재와 부재를 뒤집는 신학적 단층선이다. 믿음은 시각의 타락으로, 공포는 넘쳐나는 환각으로 변모한다. '보이지 않는 신'과 '보았다고 믿는 악마'라는 이 두 부재의 완벽한 대칭 속에서, 인간의 정신은 영원히 고통스럽게 매달린다.

공포는 이제 자기 자신의 믿음에 의해 조각된 성상을 숭배하는 의식이다.


The demon’s flash: a single frame that infected the mind

III. 공포의 의식 (The Ritual of Fear)


엑소시스트의 진정한 무대는 빙의된 소녀의 방이 아니다. 그것은 악마를 쫓는 행위인 엑소시즘 그 자체가 펼쳐지는 의식의 공간이다. 라틴어 주문은 기도의 언어라기보다, 인간이 신을 향해 던지는 불안의 주문에 가깝다. 여기서 구마는 악을 추방하는 의례가 아니라, 신성함의 파문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자기 위안이다. 공포의 의식은 궁극적으로 이렇게 완성된다. 십자가는 폭력의 도구가 되고, 기도는 경련의 파동이 되며, 믿음은 역설적으로 신성의 파열 그 자체로 정의된다. 이 모순의 심연 속에서, 공포는 또 다른 형태의 믿음으로 피어난다.

Exorcism is not the expulsion of evil, but man’s refusal to accept divine absence.



IV. 성찬의 메아리 (The Liturgy’s Echo)


십자가의 상처는 화면을 넘어, 관객의 무의식 속으로 붉은 피를 흩뿌린다. 사람들은 악마의 얼굴을 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이 붕괴하는 얼굴을 본 것 뿐이다. 악령의 공백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절대적인 공간이었다. 엑소시스트의 진정한 악몽은 유령이 아니라, 믿음이 비워낸 공허이다.


엑소시즘은 끝났다.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악령은 떠났으나, 그 자리에 남아버린 것은 인간 정신의 가장 근원적인 취약성이다. 공포는 이제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믿음의 뼈대 자체가 붕괴하며 남긴 잔해다. 그 잔해는 곧 새로운 공포를 위한 비옥한 토양이 된다.


이 영화가 남긴 공포의 정수는 구원의 실패에 대한 예언이다. 성스러운 의식을 통해 악을 물리쳤음에도, 그 승리의 결과는 '신성이 떠난 자리'라는 영원한 공백이다. 텅 빈 방, 찢겨진 믿음, 그리고 비어버린 십자가의 껍데기.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공허함이야말로 공포의 제단이며, 인간이 감히 신성함이 비워낸 자리에 세우려 했던 공포의 성상이다. 공포는 끝내 또 다른 형태의 믿음으로 귀환한다.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채, 공허 그 자체를 숭배하게 된 인간 정신의 영원한 초상이다.


Exorcism ends; the altar remains emp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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