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 청구서를 보고, 그대로 도망쳤다. 上
절망편_ chapter 4. 신용카드 청구서를 보고, 그대로 도망쳤다.
上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자는 동안에도 눈 밑은 퀭해졌다.
무슨 잠이 그렇게 오는지,
밥도 안 먹고 며칠 내내 잠만 잤다.
엄마 아빠의 술자리는 내가 치우지 않아도
내 신용카드 덕인지, 본인들이 대충이나마 치웠다.
며칠 동안 잠만 자다가,
갑자기 씻고 싶어졌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모든 게 납득이 갔다.
내가 이렇게 생겼으니, 그 사람도 떠났겠고
내가 이리 힘이 없으니, 무단결근과 권고사직.
뭐 하나 제대로 못하는 나지만,
그래도 물에 깨끗이 씻고 싶었다.
뭔가를 씻어내고 싶었다.
모든 걸, 다.
물을 틀자,
샤워기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약간은 뿌연 김이 피어올랐고,
금세 뜨거운 물이 온몸을 타고 미끄러졌다.
물은 쉴 새 없이 흘렀다.
어깨를 타고, 팔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물의 색깔은 이상했다.
마치 내 몸의 더러움이 씻기는 것 같았다.
그 물들은 바닥으로 떨어져
당연히 자신이 가야 할 곳이라는 듯,
하수구로 연이어 사라졌다.
시원했다.
그때 다시 거울이 보였다.
김이 찬 거울은 흐릿했다.
오히려 나았다.
안 보이면, 안 느껴질 줄 알았으니까.
머리를 감았다.
손가락 사이로 뻑뻑한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모래처럼 마른 두피에 물이 닿자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지만,
곧 시원해졌다.
살 것 같았다.
비누칠도 없이 얼굴에 물을 댔다.
그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물이 흐르는데,
그 안에서 또 다른 물이 흘러내렸다.
그냥, 샤워기 물이라고 믿고 싶었다.
바닥에 물이 고였다.
몸을 감싼 물줄기 사이로,
결국, 울음이 터졌다.
괜찮을 줄 알았다.
씻고 나면 조금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씻긴 건 몸뿐이었다.
마음은 여전히 씻기다 만 듯,
더 찝찝해졌다.
물기를 대충 닦고, 수건을 몸에 두른 채
화장실 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와
말라 있던 이불 위로 몸을 던졌다.
천장을 봤다.
천장은 아무 말도 없었다.
내가 울었던 것도, 지금 축 늘어진 것도
그냥 흘려보내는,
샤워기 물줄기처럼 아무 반응 없는 천장.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띵—
진동은 없었다.
소리 하나뿐인데,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지레 겁을 먹고, 손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봤다.
[국민카드] 결제예정금액 1,584,000원. (15일 출금 예정)
결제 계좌 잔액 확인 바랍니다.
문자를 본 순간,
금방 샤워한 몸인데도,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진짜 미쳤나 봐.”
작게 중얼거렸다.
내 통장 잔액이 얼만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멍하니 천장을 다시 봤다.
천장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 생각 없는 와중에
갑자기 생각났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
너무 신이 나서 한껏 들떠 도착한 곳은
쌀이 유명한 곳이었다.
맛있게 한정식을 먹고 나왔는데,
그가 핸들을 돌려 무심결에 들어간 명품 아웃렛.
구경만 하고 나오려고 했는데,
그가 입은 정장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가 너무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너무 좋아서,
그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할부로 질러버렸다.
미안해하는 그에게,
꼭 정장에 맞는 회사 들어가서
더 좋은 곳으로 드라이브 가자고 했다.
정장이 문제가 아니다.
카드값이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불쑥불쑥 떠오르는 그 사람 생각에
내 가슴을 옥죄었다.
내가 보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와의 추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차라리 눈을 감고 지냈다.
다시 난 잠만 자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지도 몰랐을 때,
월급이 들어왔다.
마지막 급여였다.
잔고가 ‘플러스’로 봐도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카드값은 빠져나갔다.
할부 몇 개는 이번에도 또 나눠졌다.
정장, 운동화, 숙박비,
다 내가 쓴 것들이 맞는데
멍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회사도 안 나가고 잠만 자서 그런 건지,
어느 날 일어나 보니 책상 위에
엄마가 가지고 있던 내 카드가 있었다.
나는 혼자서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하나 샀다.
카드가 긁혔다.
문제없이.
그걸 확인한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날 뻔했다.
겨우 이거 하나로,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느낀 것이
무척이나 서글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