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 청구서를 보고, 그대로 도망쳤다. 下
절망편_ chapter 4. 신용카드 청구서를 보고, 그대로 도망쳤다.
下
하지만 그건
그 달까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 달이었다.
다음 달에도
정장 할부는 남아 있었다.
운동화 할부도 있었다.
그날의 기분도,
아직 어디선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도 할부처럼,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회사도 없고,
그 사람도 없고,
출근도 안 하고,
밥도 잘 안 먹는데,
카드값만은,
그대로 있었다.
그날도 별다를 것 없이 눈을 떴다.
자는 게 사는 일의 대부분이던 날들이었고,
그날도 그중 하나였을 뿐이다.
휴대폰은 보지 않았다.
알람도 없었고,
누구한테 오는 연락도 없었고,
내가 보낼 메시지도 없었다.
천장을 봤다.
며칠째, 같은 자리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 팔을 들자
나뭇가지처럼 말라버린
앙상한 게 내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였다.
핸드폰을 켜고, 배달 앱을 설치했다.
닥치는 대로 시켰다.
겨우 지탱해서 일으킨 몸을 바닥에 앉히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았다.
며칠 동안 먹었다.
누워 있다가 먹고,
앉아 있다가 먹고,
앱을 켜고, 다시 먹었다.
먹을 땐 힘이 조금 났다.
입을 움직이는 동안만큼은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배가 부르면, 숨도 쉬지 못하게 많이 먹으면,
내 안에 공허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계속 먹었다.
방은 엉망이 됐다.
빈 페트병, 찌그러진 용기,
쌓여가는 플라스틱 수저들.
아무도 치우지 않았고,
나도 볼 생각이 없었다.
어느 날부턴가
앙상한 나뭇가지 같던 내 팔뚝이
그 사람이 그토록 싫어했던,
통통한 팔뚝이 된 게 눈에 들어왔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렇지만, 나는 먹어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먹는 동안만큼은 살 것 같았고,
머릿속도 잠잠해졌으니까.
오감이 음식에만 집중을 했으니.
처음엔 참았다.
내 팔뚝이 보이더라도,
속이 울렁거리더라도.
그렇게 참다가,
결국, 토했다.
그리고,
그다음부턴
스스로 목구멍에 손을 넣기 시작했다.
먹고,
토하고,
누웠다.
다시 먹고,
토하고,
누웠다.
난 뭘 받아들이면 무턱대고 다 받아들이고는,
유지도 못하고 결국 뱉어냈다.
감정도,
음식도,
현실도.
결국,
그 어떤 것도
내 안에 오래 남아 있지 않았다.
카드 한도도 마찬가지였다.
문자가 왔다.
한도초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으면서
뭐에 홀린 듯, 앱에 들어갔다.
몇 번의 터치,
무의식적인 손의 움직임.
[리볼빙 신청]
화면에는 짧은 문장이 떠 있었다.
“결제 부담을 줄여드립니다.”
어딘가 안심되는 문장이었다.
내가 무너진 건지,
이 말이 나를 구한 건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이자율 따윈 눈에 안 들어왔다.
나는 신청 버튼을 눌렀다.
난 내 카드 청구서로부터 그대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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