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편_epilogue
한동안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출근하면 있던 자리에 커피머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당연히 물은 가득 차 있고, 필터도 새것일 거라고 믿었다.
이 모든 건 원래부터 '알아서' 돌아가는 줄 알았다.
어느 날부턴가,
물을 넣어도,
커피콩을 넣어도,
커피가 안 나오기 시작했다.
"물이랑 제대로 채운 거 맞아?"
"필터 다 된 거 같은데?"
"누가 좀 관리 좀 하지..."
다들 그렇게 말만 했고,
정작 그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까.
아무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기계는 있었지만,
커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애가 매일 아침,
출근 하자마자 물을 채우고,
커피 찌꺼기를 버리고,
컵 받침을 닦고,
조용히 스위치를 눌렀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점심시간, 밥을 먹고, 사무실로 향하던 중
실장님이 농담처럼 말했다.
"예전엔 저 커피 진짜 많이 마셨는데,
저거 우리가 산 거였나?
내가 왜 샀지? 진짜 우리 아껴 써야 해."
순간
복도 끝에서 멈춰 선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피머신은 그날도 조용히 그 자리에 있었다.
물때 낀 유리통.
굳어버린 커피가루.
먼지가 소복이 쌓인 컵 몇 개.
그 애는 사라졌고,
그 애의 커피도 사라졌고,
우리는 여전히 커피머신 옆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나간다.
사람이든, 즐겨먹던 커피든
사라져도, 무신경한 이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