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r Let Me Go...
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책에 대한 안내나 사전 지식 없이 '일단' 읽어보면 새로운 느낌이 들거야~"
'나를 보내지 마'를 먼저 읽어본 지인들이 입을 모은 평이었다.
'일단' 읽어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의 깊이는 어떨지 궁금했기에 도전해 보았다.
이야기는 평범한 학생들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인 캐시, 자기 주장이 강하고 주목받길 좋아하는 루스, 그리고 돌아이 기질을 가진 예민한 감성의 토미. 이들의 하급반, 상급반 시절이 다루어지면서 청소년들의 이성에 대한 관심, 진로, 친구관계, 학교 생활 등 한 편의 성장 드라마가 펼쳐진다. 다만 학생들이 생활하고 있는 '헤일셤'이라는 공간이 주는 이질감, 그리고 맥락없이 등장하는 몇몇 용어들('기증'이라던가 '간병인' 등)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독자의 호기심을 자아낸다는 점이 특이한.
이 책은 '복제 인간'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복제 인간'?
'복제 인간'이라면 으레 미래 사회를 떠올리게 된다. 영화 '아일랜드'나 '가타카', 그리고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가 보여주는 그런 디스토피아의 미래. 그런데 이 책은 출판된 2005년 무렵보다 훨씬 이전인 20세기 중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여타의 SF와는 접근이 달랐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상영된 영화 '아일랜드'가 기증을 위해 복제된 인간들이 진취적으로 근원자를 찾아 나서고 자아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극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데 반해, '나를 보내지 마'는 담담하게, 복제 인간들이 보여주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면들에 집중하면서 너무도 지루하고, 일상적인 그들의 성장을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복제인간들의 성장을 받아들여야만 하기에, 결국은 수단을 위해 존재해야하는 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연민으로 지극한 슬픔이 자리잡게 된다.
"... 대중의 생각이나 감정은 이쪽으로 쏠렸다가 저쪽으로 가 버리지. 그 과정 중 한 지점이 너희의 성장기와 겹쳤던 거란다."
"마치 왔다가 가 버리는 유행과도 같군요.
우리에겐 단 한번밖에 없는 삶인데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헤일셤에서 성장기를 보낸 학생들은 코티지라는 장소에서 일종의 대기를 한 후 '기증자' 또는 '간병인'의 삶을 살게 된다. 대부분은'간병인'으로 시작하지만, 기증자를 돌보는 삶에 두려움과 환멸을 느껴 일찌감치 '기증자'의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는데, 캐시는 꽤나 오랜 시간(무려 12년 정도!) 간병인의 삶을 만족하며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루스와 토미의 간병을 맡으며 캐시는 헤일셤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간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마음 속 질문들의 답을 찾아보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어느날 헤일셤은 폐쇄되어버린다.
헤일셤을 관리했던 에밀리 선생님을 찾아간 캐시와 토미. 다른 복제인간을 보호(?)하는 기관들과 다르게, 헤일셤에서는 아이들의 창의력과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수업들이 진행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이 모든 성장의 과정들은 헤일셤을 투자하는 대중의 관점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일종의 유행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에겐 단 한번밖에 없는 삶인데 말이에요."라고 말하는 캐시에게서,
'인간'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자아'를 가지고 있는, 그리고 자아의 '확장'과 '성장'이 가능한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인간이라고 규정해야할 것인가?!
이 책의 제목인 '나를 보내지마'는 캐시가 즐겨듣던 오래된 팝송 'Never Let Me Go.'를 의미한다. 헤일셤 시절 캐시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인형을 품에 안고 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게 되는데, 마침 지나가던 마담(헤일셤 운영 관계자)이 캐시를 바라보며 애잔한 눈물을 흘리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부터 줄곧 캐시는 도대체 마담이 왜 눈물을 흘린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는데...
"... 저는 그게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어떤 여자 이야기라고 상상했어요. 그런데 그 여자에게 아이가 생겼고, 그래서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그 여자는 혹시 뭔가가 자신들을 떼어놓을까 두려워서 아기를 가슴에 꼭 껴안고는, 베이비, 베이비, 네버 렛 미 고 하고 노래를 했던 거에요. 진짜 가사의 내용과는 달랐지만 당시에 저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
...
"정말 흥미로운 관찰이구나... 그날 춤을 추는 너에게서 내가 본 건 좀 다른 거였다. 나는 빠르게 다가오는 신세계를 보았지. 과거의 질병에 대한 더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그래, 더 많은 치료법 말이야. ... 나는 어린 소녀가 두 눈을 감은 채 과거의 세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자기도 잘 알고 있는 과거의 세계를 가슴에 안고 있는 걸 보았어. 그걸 가슴에 안고 그 애는 결코 자기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Lever Let Me Go.'를 해석하는 너무도 인간적인 바램을 담은 캐시의 모습과 (소설 속 복제인간들은 임신이 불가능함.), 북제인간들의 더 나은 복지를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변명하는 에밀리 선생님이나 마담 역시 이들을 하나의 '수단'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는 극명한 대립을 보여준다. 결국 캐시가 마음에 품고 있었던 일말의 기대- 그들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나 인간다움에 대한 갈망은 산산조각 나고야 만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다움이라는 존재의 가치는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이 책을 덮으며 머릿 속에 맴도는 질문들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수많은 질병들이 치유되는 세상에서,
인간이라는 존재,
그리고 인간다움의 가치들을 어떻게 증명하고 유지할 수 있을지.
한편으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복제인간들이 등장한다면 우리는 이 존재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언젠가는 풀어야 할 숙제인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워지는 밤이다.
그래서 결론은,
강추! 새해 첫 독서, 성공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