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의 기간, 종려주일을 앞두고
비가 그친 뒤, 알싸한 봄공기가 정신을 맑게 깨우던 저녁이었다. 꽃샘바람에 나붓거리는 벚꽃들의 향기를 지나, 제리코 비치(Jericho Beach)가 내려다보이는 UBC 챈 센터(Chan Centre)로 향했다. 큰딸과 예비사위, 그리고 친구와 함께하는 행복한 동행이다.
오늘 이곳에서는 밴쿠버 시향 오케스트라와 밴쿠버 시온 합창단, 그리고 객원으로 참여한 밴쿠버 챔버 콰이어가 헨델의 메시아(Messiah) 전곡을 협연한다.
객석에 앉자 웅장한 홀의 기운이 전해짐과 동시에 천장에서 쏟아지는 냉기 또한 공연을 기다리는 동안 몸을 움츠리게 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서서히 달아오르는 합창의 열기가 그 한기를 조금씩 밀어내 주었다.
테너 솔리스트의 아름다운 미성으로 시작된 '내 백성을 위로하라 (Comfort ye my people)를 듣는 순간,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은 녹진히 내려앉았고, 이어지는 첫 합창 '주의 영광(And the Glory of the Lord)'은 대학 시절 직접 불러보았던 푸르른 추억 속으로 이끌었다.
초반부엔 180여 명의 규모가 만들어낼 법한 쓰나미 같은 압도적인 폭발력에는 다소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이 스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절제된 목소리에 스며든 연륜과 청아한 젊음의 조화가 그 빈자리를 메워 갔고, 음량 또한 점차 풍성해지며 마침내 무대를 깊이 있게 채워 갔다.
이번 공연의 주역인 밴쿠버 시온 합창단은 44년간 활동해 온 전통 있는 시니어 합창단이다. 매년 정기연주회를 열고 2년에 한 번씩 해외 공연을 다니며, 모금된 수익금을 아프리카나 난민 캠프 등에 전달하는 귀한 사역을 이어오고 있다. 그간 쌓인 시간이 빚어낸 160여 단원들의 목소리와, 객원으로 참여한 20대 챔버 콰이어의 맑고 투명한 음색이 어우러져 무대에 입체감과 생기를 더했다.
무엇보다 이번 무대의 백미는 소프라노 솔리스트로 출연한 거장 김영미 님이었다. 72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정한 모습으로 무대에 선 그녀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흐르는 세월 속에 목소리의 나이 듦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겠으나, 여전히 현역으로 자리를 빛내는 그녀의 무대는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특히 **'Rejoice Greatly'**를 부를 때, 빠르게 굴리는 콜로라투라 (Coloratura) 기법은 마치 쟁반 위를 구르는 옥구슬 같았다. 젊은 날의 정점과는 또 다른, 베테랑 성악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노련함과 기품에 깊은 팬심을 담아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반면, 음악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은 큰딸은 테너 솔리스트의 수려한 얼굴을 더 깊이 묵상하는 듯했다. 너무 잘생겼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는 통에, 클래식 연주의 교양은 살짝 풀어두고 한바탕 웃음으로 팽팽했던 긴장을 녹여내기도 했다.
밴쿠버시온합창단에게 이번 무대는 거대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하나의 음절에 여러 음을 빠르게 이어서 부르는 멜리스마 (Melisma) 구간을 아마추어 합창단이 전곡 연주에서 소화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침저녁으로 집안을 울리던 남편의 연습의 파편들이 오케스트라와 만나 비로소 하나의 장엄한 화음으로 어우러지는 것을 보며, 그동안의 노력과 헌신에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하이라이트인 **'할렐루야 (Hallelujah)'**에서는 모든 관객이 일제히 기립했다. 1743년 런던 초연 당시, 곡의 장엄함에 감동한 국왕 조지 2세가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 아는 만큼 들린다고 했던가. 180인의 목소리가 한 방향으로 모이자, 그 울림은 합창을 넘어 관객과 맞닿은 하나의 호흡이 되었다.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곡 **'죽임 당하신 어린양 (Worthy is the Lamb)'** 은 장엄하고 깊은 서사를 찍는 정점에 걸맞게 온전히 연주에 몰입하게 했다. 특히 수십 소절에 걸친 긴 '아멘(Amen)'
구간으로 유명한데, 푸가형식의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거대한 아멘의 물결이 인간이 신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성스러운 고백으로 울려 퍼졌다. 아멘의 숭고한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 전율 돋는 정적이 잠시 머물다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생각해 보니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다. 젊은 날 아픈 목 때문에 접어야 했던 남편의 꿈이 합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무대에 오르고, 그 덕분에 나는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메시아 전곡 직관'이라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못다 이룬 꿈이 합창의 큰 울림으로 되돌아오니, 희귀하게 찾아오는 행복의 순간에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관조하게 된다. 바람결에 더 가벼워진 벚꽃이 흩날리고, 헨델의 메시아로 빚어낸 선율은 봄향기 그윽한 밤의 멋진 선물이 되었다.
덧말: 종려주일, 고난 앞의 겸손과 부활의 환희를 묵상하며
헨델의 <메시아>가 남긴 장엄한 여운을 안고, **종려주일(Palm Sunday)**을 맞이합니다.
2천 년 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그 발걸음 속에는 왕의 위엄보다 낮은 곳을 향하는 지극한 겸손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군중들이 흔들던 종려나무 가지의 물결은 곧 닥쳐올 고난을 예고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이길 부활의 환희를 향한 서막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닮아 있지 않을까요. 사라진 줄 알았던 꿈이 합창의 울림으로 되돌아오듯, 삶의 고단한 마디마디를 겸손히 인내하며 채워가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예상치 못한 벅찬 기쁨과 환희를 마주하게 되길 소망해 봅니다.
밴쿠버의 봄향기와 180인의 목소리가 빚어낸 찬양의 고백이, 고난의 주간을 앞둔 여러분의 마음에도 평화의 종려나무 가지가 되어 깃들기를 바랍니다. 비록 낮은 곳을 걷는 오늘일지라도, 우리 안의 선율은 이미 다가올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