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군번 훈련병의 일기(11.이등병)

Episode 11: 이등병 계급장

by 행복상상

(17) 잃어버린 6주


1991년 6월 19일. 수요일.

총검술, 제식훈련, 분열 연습 실시.


훈련이 다시 시작 됐냐고? 만약 그렇다면 안 산다, 안 살아. 그럼 뭐냐고? 며칠 동안을 눈코 뜰 새 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준비한 재롱거리야. 수료와 더불어 맞게 되는 면회 시간에 부모님께 보여드릴 재롱 말이야. 이제는 장난감처럼 여겨지는 총을 갖고 노는 모습과, 제식 및 분열을 통해 그동안 익힌 걸음마도 보여 드려야 하니, 완전히 '엄마 앞에서 짝짜꿍'이 아니냐고.


어젯밤은 내내 설레는 맘으로 보냈어. 한 밤중에 불침번이 아닌데도 일어나서 이등병 계급장이 달릴 자리에 똑딱이 단추가 잘 붙어 있는지 살피느라고. 부모님이 직접 달아 주시기로 되어 있거든. 전투화도 훈련 때 신어서 빛바랜 B급 대신, A급 전투화에 물광을 내고, 행여나 물이라도 묻을까 봐 관물대 위에 고이 모셔두었고 말이지. 이만하면 면회 준비 완료. 기대하시라 개봉 박두!


처음 입소할 때 구르며 들어왔던 그 길을 웃으며 나간다. 히히히. 좋아라. 다른 녀석들의 입도 안 다물어져. 오늘따라 발도 잘 맞고, 손도 쭉쭉 하늘로 날아갈 듯 잘 올라가고. 길 옆으로 자리한 교장에서는 후임병들이 교육을 받고 있어.


"아가들아, 열심히 해라. 쥐구멍에도 볕 들날 있다고, 니들에게도 내일은 있는 것이여. 암암 그렇고 말고."


입소대대에 도착. 만감이 교차하는군. 벌써 스탠드 위에 누군가의 부모님들이 와 계셔. 얼씨구, 벌써 한 녀석이 손을 흔들고 난리가 났어요. 진득하게 있지 못하고서리. 그나저나 아직 안 오셨나? 빨리 뵙고 싶은데, 시력이 안 좋아서 보이질 않으니.


"어머니 아버지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메이게 불러 봅니다~"

- 「잃어버린 30」 / 1983년 발매 / 작사 박건호, 작곡 남국인, 노래 설운도 -


이윽고 수료식 시작. 국민의례, 훈련소장의 훈시 말씀에 이어서 대망의 '이등병 계급장 수여식'. 스탠드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아버지들, 어머니들.


'왜 안 오시지? 혹시 늦으시는 거 아냐? 아, 저기!'


한달음에 달려와 반가와 하시다 눈물을 보이시는 어머니. 울지 마세요. 왜 갑자기 눈이 아프지? 계급장을 달아 주시는 어머니의 손이 울고 있다. 가슴에 그 떨림이 느껴진다. 내 가슴도 따라 운다. 엄마~


이어지는 순서는 스무 살 먹은 아가들의 재롱 잔치. 총을 들고 하나 둘 셋, 아장아장 걸으며 하나 둘 셋. 오늘따라 총이 왜 이리 가볍니. 랄랄라 랄라라, 랄라 랄랄랄. 스머프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경쾌한 발걸음.


어휴, 배불러. 집에서 정성 들여 가져오신 반찬들, 통닭, 실한 과일들. 자꾸 권하시는 부모님의 얼굴을 뵈니 꼭 집에 온 것만 같아. 평소의 반도 못 먹었는데 이상하리 만큼 배가 부르네. 저 더 이상은 못 먹어요. 부모님 더 드세요. 형도 더 먹고. 이래서 사람은 군대엘 가야 하나 봐. 효자 탄생했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돌아가는 길. 부모님 앞에서 어버이 은혜에 감사하는 노랠 불렀어. 감사합니다. 자대 배치받고 휴가 가서 뵐게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충성!



4장. 이등병


(1) 국민의 권리 행사


1991년 6월 20일(목).

지방의회 선거가 실시되는 임시 공휴일로, 훈련도 없고, 사역도 없는 완전히 놀고먹는 날.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주권을 행사하는 엄숙한 날이지. 어디 보자~ 누가 누가 잘 낫나? 투표용지를 받아서 기표를 한 후에 -물론 비밀투표로- 봉투에 넣어 봉하고 투표함에 골인. 부재자 투표 끝. 정책 설명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선거 공보를 통해 충분히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한 거니까 후회는 없어. 난 내 결정을 믿어요. 투표에는 연습이란 없으니까.



(2) 생쥐 내무실장의 눈물


자대 배치를 받고 떠나기에 앞서 전우래를 다지는 시간. 내무반장과 조교를 불러다 선물을 증정하고, PX에서 풍족하게 먹거리를 조달하여 송별 파티를 개최했어. 우리 기수 전까지는 이런 시간이 없었다는데, 우린 운이 좋은가 봐. 내무실장이 한사코 선물을 안 받으려 하네. 이유를 물으니, 훈련병들에게 선물을 받으면 나중에 소원수리에서 걸릴 우려가 있다나? 우리를 못 믿는 거야. 두 달이나 한 솥밥을 먹었는데 말이야.


"받아!"


이렇게 말하면 싸움 나니까 좋게 좋게 얼르고 달래서 겨우겨우 증정에 성공. 생쥐 내무실장의 그 조그만 눈에도 이슬이 반짝이고,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하는 거 있지. 하긴 정이 많이 들었지. 제대할 때까지 몸 건강하길 빕니다.


사진 콘테스트. 내무반장이 아무래도 부담이 되었던지 받은 것만큼 1등에게 상을 주겠다는 거지. 저마다 수첩을 뒤져서 애인, 친구, 가족사진을 출품했어. 소대원들의 열띤 심사 끝에, 수많은 경쟁자를 따돌리고 방년 5세의 여자아이 사진이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지.


정에 굶주린 사람들, 순수하다 못해 단순해진 이들. 전우여 그대들을 위하여! 지화자!


(19)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1991년 6월 21일(금)

더블백을 꾸린다. 이것저것 다 반납하고 나니까 짐이 별로 안 남네. 이제 얼마 후에 어둠이 깔리면 우리는 열차를 타고 이곳을 떠난다. 곧 서로에게 작별을 하겠지. 식사를 하러 갈 때마다 "38번 훈련병, 턱걸이 준비 끝"을 외치며 열 번 이상을 매달려야 했던 철봉 앞에서, 어제는 이등병을 외치며 환호했었지. 하지만 오늘은 어렵게 얻은 이등병도 왠지 즐겁지 않아. 왜일까?


각자의 주특기 번호를 받고, 군번줄(인식표)을 받고, 월급을 받고, 더블백을 맸어. 더블백을 메고서 이등병 계급장이 선명한 전투모를 쓰고 있으려니, 누군가의 입에서인지 작별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누구야? 이런 날 그렇게 슬픈 노래를 부르다니. 그 노랠 부르면 꼭 눈물이 난단 말이야.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

어디 간들 잊으리오 두터운 우리 정 (중략)

다시 만날 그날 위해 노래를 부르자"

- 「석별의 정(소코틀랜드 민요: Auld Lang Syne)」 / 우리말번역 강소천 -


이제부터 가는 길은 아무도 모른다. 직접 자대로 가는 애들도 있고, 여기 훈련소에 조교로 남는 애들도 있고, 카투사(KATUSA)로 차출되어 미군 부대로 가기 전에 유격받으러 25 연대로 가는 애들도 있겠지. 나머지도 후반기 교육을 받으러 대전 부산 김해 광주 용인 등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이야. 하지만 난 믿는다. 모두 잘 해낼 거라고. 아무렴, 29 연대 10중대 1소대인걸. 파이팅!



< 떠나는 전우에게 >


기울어가는 저녁 햇살을 받아

구릿빛으로 빛나는 건강한 팔뚝으로

행여 보일까

구릿빛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가리고.


흐느끼는 그대들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그대들

끌어안고 입 맞추고픈 그대들.


제일 장난 많이 치고

사고 많이 치던 녀석

그대가 제일 크게 우는구나.


그래 울어라

앞으로는 울지 못하리니

그래 실컷 울자.


분단의 아픔이 없었다면

우린 여기 오지 않았고

만나지도 못했겠지.


그래,

우리 민족의 아픔을 위해 울어 보자

그래서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면

매일을 눈물로 지새워도 괜찮겠지.


앞으로 이곳에 들어올 후임들도

우리와 같이 눈물로 이곳을 물들이겠지

우리 선임들도 그러했을 거고.


그 눈물들이 헛되지 않다면

우리 아들 때가 되면

틀림없이 통일된 조국에 태극기가 휘날릴 거야.


잘 가라 전우여

통일된 조국의 그날까지 건강해라.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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