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8: 강철부대
부푼 가슴을 안고 기상시간 보다 먼저 몰래 눈을 떴어. 왜냐며언~ 비가 오나 보려고.
"낮부터 내린 비는 이 저녁 유리창에 이슬만 뿌려 놓고서
밤이 되면 더욱 커지는 시계 소리처럼 내 마음을 흔들고 있네~"
- 「유리창엔 비」 / 1989년 발매 / 작사&작곡 이정한, 노래 햇빛촌 -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그대 숨소리 살아 있는 듯 느껴지면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듯 지니고 나와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
- 「비 오는 날 수채화」 / 1989년 10월 28일 발매 / 작사&작곡 강인원, 노래 강인원&권인하&김현식 -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이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 머리 소녀야~"
- 「긴 머리 소녀」 / 1975년 발매 / 오세복 작곡, 손철 작사, 노래 둘다섯 -
이렇게 여러 노래가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건, 어제의 짜릿한 순간이 생각 나서지. 그토록 고대하던 비가 내리기 시작한 그 순간을 말이야. 중대원 모두가 기쁨에 들떠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랠 흥얼거렸어.
"우두커니 창가에 기대앉아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불렀지.
니가 즐겨 듣던 그 노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 1992년 10월 29일 발매 / 작사&작곡 김창환, 노래 김건모 -
모두가 한 마음으로 '내일 이맘때에도 내무반에서 편하게 이념교육이나 받겠구나'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그 기대가 현실이 되었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나는 창문을 열고 손을 살포시 내밀었어. 바로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비가 그. 쳤. 다.! 오, 주여. 정녕 저를 버리시나이까?
한 시간 뒤.
어제와는 180도 다르게 이글거리는 태양. '유격장 가는 길' 푯말이 우릴 반긴다. 길도 불편한데 이 유격복은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네. 땅바닥을 기어다녀야 하는 특성상 여기저기를 덧대어 재활용 한 건 알겠는데, 만든 꼴이 꼭 각설이 군단 같군.
모두 힘들다는 걸 알고는 눈치만 살필 뿐, 먼저 나서서 얘기하는 애가 하나도 없는 거 있지.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우리 소대는 오전에 헬기 레펠(현수하강)이라네. 좀 덜 구르겠다.
유격 훈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PT(Physical Trainning: 육체단련) 체조로 몸을 푼 다음, 인간이 가장 심하게 공포를 느낀다는 10미터 높이의 헬기 레펠 망대에 올라가기 시작. '유격유격유격...' 공포를 달래기 위해 구호를 외치며 가지만, 가면 갈수록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네. 심장의 펌프질이 너무 과해서 그런가? 하기사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다리가 후들거릴 땐 심장의 고동소리도 커지더라마는. 손이 상하는 걸 방지해 주는 두꺼운 장갑을 내려다보며 앞사람 꽁무니를 따라 올라가니 드디어 정상에 기립. '으으~ 아찔해'.
그나저나 저 선수(?)는 어찌 된 걸까? 몸에 줄을 감고 있으니까 그냥 엉덩이 뒤에 있는 손만 느슨하게 해 주면 저절로 내려가게 되어 있는데. 그걸 못하고 발만 떼니까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거 아냐. 보통 때 같으면 까르르 웃어 버렸겠지만 다음 순번인 나로서는 더 떨려 올 뿐.
휴~. 심호흡을 하고 한 단 아래로 내려섰어. 우선 줄을 감고 '에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벌렁. 줄을 풀어서 상체를 지면과 수평으로 만들었어. 일단 자세는 좋아.
"39번 올빼미 하강 준비 끝!"
"하강"
자, 엉덩이에 붙어있던 손을 느슨하게 푸는 거야. 하나 둘 셋. 쭈르르르르륵.
'엄마!'
2~3초 밖에 안 되는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채 밖으로 나오기 전에 끝나버린 거 있지. 오, 주여. 제가 정말 이걸 해냈단 말입니까?
그런데, 흥분도 잠시. 하강 신호가 떨어지기도 전에 내려와 버린 걸. 이상하지? 분명 하강 신호를 들었는데. 흥분한 3소대 내무반장이 길길이 날뛰는데, 와 무섭다. 저 녀석 안색이 파래진 것 좀 봐. 물론,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차원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사다리 위에서 머리를 차버리다니. 하마터면 굴러 떨어질 뻔했지 뭐야. 어휴 열받아. 어디, 소원 수리 때 보자. 옆을 돌아보니 동기들 모두 눈을 부라리는 게 나랑 같은 심정이란 게 느껴졌어. 고난과 역경 속에서 더욱 단단해지는 전우애여!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들리는가 한 맺힌 눈동자"
-「전선을 간다」 / 1981년 발매 / 작사 우용삼, 작곡 최창권 -
오후. 유격교장.
초여름을 녹이는 태양의 복사열. 그 열을 받은 대지의 복사열. 아지랑이 피는 널따란 황토 흙밭. 거기에 서있는 열받은(?) 우리들. 열받은 조교들.
PT체조를 한 동작 한 동작씩 끊어서 가르쳐 주는 시간. 벌 받는 것 같이 힘들지만 차라리 누워 있을 수 있으니 좋군 그래. 빙그레 하며 입술이 좌우로 벌어지는 순간, 잠깐의 쉼도 만끽하게 두지 못하는 중대장의 헬 게이트 오픈 멘트.
"모두 집어치워! 강아지들(원색적인 욕설이라 순화시켜서). 훈련병은 편하게 해 주면 안 돼! 개XX들(원래의 뉘앙스를 살려서). 아침 훈련도 개판으로 하고, 부분동작 하라니까 놀 궁리만 해. 어디 한 번 죽어 봐. PT도 뭐고 다 필요 없어."
"앞으로 취침. 일어서. 뒤로 취침. 일어서. 앞으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뒤로 취침. 포복!"
안경 너머로 맑은 햇살. 어깨에 젖어오는 통증. 머리에 부딪히는 숱한 전투화. 제발 빨리 좀 가라.
"일어서. 앞으로 취침. 낮은 포복!"
이번엔 반대로 기어가기. 팔꿈치가 까졌는지 어쩐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돌 밭을 긴다. 머리가 멍하다. 앞에서 기는 동료의 발길질에 손과 얼굴이 부딪힌다. 아파할 겨를도 없다. 아무래도 무릎이 벗어진 듯.
평소 빈혈이 없었는데 진단이 잘못된 것 같아. 옆으로 구를 땐 마치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다. 토할 것 같아. 이제 그만,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
어지럽지만 이를 악문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개XX. 그래 누가 이기나 해 보자. X팔!
이윽고 장애물 코스 도착. 첫 관문은 파도타기. 머리를 넣고 뒤로 몸을 빼낸 다음 하늘을 보며 다음 칸으로 다시 몸을 밀어 넣는데, 이걸 반복하는 모습이 꼭 파도가 이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래. 낭만적이지만 문어같이 빼대 없는 집안의 후손이면 쉽겠지만, 나 같이 뼈대 있는 집안의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 안 해, 못해!
"39번 올빼미 통과, 끝!"
잠시 후 나도 모르게 통과 보고를 하고 있지 뭐야.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생각 안 나지만, 슈퍼 '을'의 신분인 훈련병인데 하라면 해야지 별 수 있어?
다음은 가슴 높이의 가로 막대(통나무 봉)를 좌우로 수평이 되게 뛰어넘는 코스. 체조 선수들이 말 모양의 대 위에서 팔로 버티며 연기하는 '안마' 종목을 떠올려 보시라. 추락의 공포, 남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허리를 다칠 것만 같은 진짜 불안감(추억의 덩달이 시리즈에서, 불안감을 주제로 덩달이가 이런 작문을 했었더랬다. 옥상에 널려진 빨래를 걷다 말고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물으셨다. "이게 어멈 부란감?")이 덮쳐왔다. 그런데, 거참 신기하네. 하니까 되잖아?
"유격장에는 장애물이 많네. 쾌지나 칭칭 나네에. 이코스 저 코스 재미도 있네. 쾌지나 칭칭 나네에~" 그중에서도 제일 재밌는 하이라이트는 봉 타고 물 건너기. "아~ 아아아~" 타잔이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벌써 많은 녀석들이 흙탕물 속에 거꾸로 처박혔어. 미꾸라지 많이 잡았니?
드디어 내 차례. 봉이 온다. 한쪽 다리를 걸치고 앉아서 출발. 스무스하게~ 어어어? 넘어가유~. 첨벙. Splash! 내무반에 돌아가자마자 옷을 널어야겠어. 귀에 있는 달팽이관인지 반고리관인지가 잘못된 것 같아. 왜 이리 균형감각이 없지?
아무튼 힘든 하루가 지나갔어. 사내들은 다 짐승이라고 했던가? 맞긴 해. 이렇게 냄새나고 지저분한 몰골을 보니까. 아까처럼 야수로 돌변하기도 하고 말이야. 양처럼 온순한 내 입에서 독사 같은 욕설이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게다가 소원수리를 쓰네 어쩌네 하다가도, 훈련이 다 끝나고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걸 보면 IQ도 제로에 가까운 것 같아. 서로 눈을 부라리던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지. 그래도 아름다워 보여. 단순미에 백치미까지 철철 넘치는 게.
그나저나 백치미 얘기가 나오니까 갑자기 백김치가 떠오르고, 동치미가 먹고 싶네. 나야말로 너무 단순해진 거 아냐? 집이 정말 그립다!
안개 낀 하루를 구보로 연다. 하나 둘, 하나 둘. 아, 개운해. 아침 공기는 정말 상쾌하단 말이야.
"산비탈을 휘도는 안개 낀 산악
아침을 열어주는 사나이 함성 (중략)
군화소리 착착착 승리를 위해
박수소리 착착착 영광을 위해"
-「구보가」 / 1988년 발매 / 작사 김영종, 작곡 이운환 -
오늘은 난생처음으로 수류탄을 던지는 날. 어릴 적 '전투', '전우' 같은 전쟁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쾌감을 맛보는 날. 가슴이 뛰고 무섭지만 그래도 할 거야. 왜? 찾아먹을 건 전부 찾아 먹어야지! 정량 몰라? 국민의 세금으로 주어진 기회인데 놓칠 수 없잖아. 자 준비를 해볼까?
"두근두근 울렁울렁 가슴 뛰지만
무섭고도 두려워서 겁이 나지만
신밧드야 오늘은 어디로 가나
우리 모두 듣고 싶다 얘기 보따리~"
- 만화영화「신밧드의 모험」 주제가 / 1976년 발매 / 작사 박준영, 작곡 안길웅, 노래 이지혜 -
논산은 어딜 가나 황토흙뿐이군. 질척 질척한 길을 따라 올라가서 예비 투척 훈련으로 몸을 푼다. 고것 참. 장난감 놀이를 하는 것 같네. 조립식이라서 만들기도 쉽고,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도 않고 말이야. 조교들 말로는 잘못해서 손이 날아가는 사고도 있었다지만 이 정도야 장난감이지. 밖에다 내다 팔면 공전의 히트 상품으로 만들 자신이 있는데 아쉽다. 자세 연습을 열심히 해야지. 멋진 폼으로 던져야 제 맛이 나지 않겠어? 나중에 할 얘기도 있고 말이야.
오후 학과 출장.
안전 수칙을 복창하고, 또 복창하고. 주의사항을 전달받고 또 전달받고. 이어서 마지막 점검까지. 오늘 꿈자리가 뒤숭숭한 사람 -다시 말하면 꿈에 돌아가신 할머니, 심지어 사돈의 팔촌이라도 보였다던가 하는 사람- 들은 모두 원하기만 하면 빼주겠다는 거야. 나 참, 훈련을 받다 보니 별 일이 다 생기네. 훈련에서 열외 시키겠다는 말을 다 듣고. 하지만 안 하면 손해인데 누가 빠져, 안 그래? 어럽쇼? 셋씩이나 빠지네. 가만있어라. 내가 엊저녁에 무슨 꿈을 꿨더라? 도리도리, 아냐! 비록 개꿈을 꿨더라도 한다면 한다!
수류탄을 전달받고, 언덕 아래에 만들어진 방호벽으로 진입. 클립 제거. 안전핀 제거. 괜찮아. 손잡이만 꾹 누르고 있으면 죽어도 안 터진댔어.
하나 둘 셋. 던진다~ 있는 힘껏, 야잇!
방호벽 너머 큰 저수지에 첨벙첨벙하고 수류탄들이 떨어지는 소리. 잠시 후, 콰콰콰 쾅! 우히히히 재밌어라.
소리가 줄어들고 고개를 드는 순간, 하이바에 전해오는 묵직한 충격과 불길한 예감. 중대장의 화난 눈. 내무반장의 딱하단 듯한 눈초리! 응, 뭐가 잘못된 거야? 제대로 던졌는데.
"이 개XX. 그렇게 무서워? 너무 낮게 던졌잖아. 겨우 물 언저리에 맞았다. 참, 한심해서."
그래도 놓치거나, 참호 안으로 떨어트리거나, 뒤로 빠트리지 않았잖아. 내가 볼링 칠 때도 뒤로 빠트린 적은 없다 뭐. 씨, 괜히 나만 미워해. 그래도 물엔 들어갔는데... 나 수료할 수 있는 거 맞지?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