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군번 훈련병의 일기(10.올 나잇)

Episode 10: 밤을 잊은 그대에게

by 행복상상

(16) 까만 밤을 졸며 걷는 재미


최후의 관문, 야간 행군!


고등학교 시절에 6킬로미터 밖에 안 되는 단축 마라톤도 완주하는데 죽을 둥 살 둥 했던 내가, 수십 킬로미터를 잠도 안 자고 걸어야 하다니 이럴 땐 감기라도 걸려서 의무대에 누워있어야 하는데, 워낙 건강하다 보니 그런 행운도 안따르고. 에휴~.


그동안 심심할 때마다 군장 싸기를 하도 여러 번 해서 이젠 눈을 감고도 할 정도로 숙달이 되었지만, 잘 점검을 해야지. 잘못해서 물품을 잃어버리기라도 해 봐 얼마나 잔소리를 듣겠어?


낮잠을 두어 시간 자고, 저녁을 챙겨 먹고, PX에서 빵이랑 음료수를 추진해 먹고, 군장과 인식표를 점검한 후 드디어 집결. 앞사람의 군장을 두드리며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 야삽, 전투화, 반합, 총, 기타 등등.


한 가지 덧붙일 말은, 오래 걷다 보면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다는 거야. 그래서 양말에 비누칠을 하고, 어떤 애들은 활동화(운동화) 깔창까지 깔았지 뭐야? 사내자식들이 말이야, 고깟 행군 가지고 요란 떨기는... 쯧쯧. 날 봐! 그런 거 없어도 끄떡없잖아. 그러니까.. 그.. 저.. 음... 여자들 스타킹 신은 거 빼고는.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난 남자를 좋아하진 않아. 우리 국군은 그런 애들은 안 받는다고. 알아? 그걸 신으면 발이 편하다고 해서, 그래서 억지로 신은 거지 딴 이유가 있는 건 아니라고. PX 방위병, 아니 단기사병한테 부탁해서 구입한 건데, 내무반장들도 묵인해 주더라고. 낙오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말이야.


드디어 출발.

정문으로 나가서, 연무역을 지나, 여산면, 소룡고개(깔딱고개)를 넘어, 마산면을 거쳐 후문으로 돌아오는 53킬로미터의 거리를 12시간 동안 걷는 대장정에 나서는 거지.


수킬로를 걷고 난 후 맞는 첫 번째 휴식. 벌써부터 지치면 안 되는데 겨우 8시 정도밖에 안 되었거든. 새벽까지 계속 걸으려면 아직 까마득한데... 이제 가야 할 곳은 눈물고개. 이 고개를 넘다 숱한 선배 훈련병들이 눈물을 뿌려댔다는 유명한 군사 유적지. 검푸른 산이 가슴에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래도 갈 수 있어. 이쯤이야. 주여, 힘을 주소서.


고개를 오르는 중간, 앞서 가던 녀석이 비지땀을 흘리며 주저앉으려 해. "야, 여기서 주저앉으면 더는 갈 수 없어. 낙오하면 안 돼. 너뿐 아니라 나도 힘들긴 마찬가지야. 내가 받쳐 줄 테니 조금만 더 버텨 봐." 말하고 싶었지만, 힘들어서 목구멍으로 말이 넘어오지 않았어. 그래도 내 맘을 알았는지 녀석이 잘 참아 내더라고. 장해.


반환점. 휴식을 취하며 빵과 컵라면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어. 야, 이건 정말 꿀맛이군. 이래서 사람들이 야식을 즐기는구나. 참, 밤에 뭘 먹으면 아침에 얼굴이 붓고 살이 찐다는데 애써 가꾼 몸매가 망가지지 않을까 몰라? 아직까지는 발에 물집 하나 없이 깨끗하네. 좋았어. 끝까지 잘해 보자고. 우리 중대가 선두에 서니까 괜찮을 거야. 자, 파이팅!


산 하나를 더 넘어서 내리막길. 누군가는 내리막길이 더 쉽다고 했는데, 나한텐 정 반대야. 걷는 도중에 대여섯 번을 삐끗삐끗. 30킬로에 달하는 군장 무게를 내 여린 발목이 버티질 못하는 거야. 휴식이라도 주었으면 좋으련만. 아까 고개에서 비틀대던 앞 녀석은 펄펄 날아다니는데, 난 이게 뭐람. 이제 무릎까지 저려오네. 앞으로 족히 다섯 시간은 더 걸어야 하는데 어쩌나. 제발 날이 밝았으면...


"해야 떠라 해야 떠라 말갛게 해야 솟아라

고운 해야 어둠 살라 먹고 애띤 얼굴 솟아라~"

- 「해야」 / 1980년 발매(대학가요제 은상곡) / 작사&작곡 조하문, 노래 마그마

「해」(모티브가 된 시) / 상아탑 6호 수록(1946년 5월호) / 지은이 박두진 -

체력을 안배한 선두 교체. 그리고 마지막 휴식.

수통을 꺼내 물을 마셨어. 물을 너무 많이 먹으면 퍼진다고 해서 아껴 두었는데. 다른 녀석들은 벌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버린 모양이야. 안돼~에. 내꼬야. 나도 물 없떠. 그래도 달라고? 좋아, 조금씩만 마시는 거야. 많이 먹으면 진짜 퍼져. 자 소금 반 개랑 같이 먹어라. 녀석들... 얼굴에 위장크림을 검게 발라서 눈만 반짝이는군. 참, 건빵이 어딨더라? 여기 방독면 하고 같이 뒀지롱. 배가 든든해야 잘 견딜 수 있을 거야. 누워 자고 싶지만 그러면 정말 못 일어날 것 같아. 힘들어도 앉아 있어야지.


주님, 당신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얼마나 어려우셨을지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주 조금요.


군장 하나만으로도 벌써 양 어깨의 감각이 없는데, 이 걸리적거리는 총하고 방독면은 좀 떼어낼 수 없을까. 전쟁이 터지면 탄약통까지 더해서 들고뛰어야 한다지? 그런 끔찍한 일은 정말 없었으면 좋겠어.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도 군장을 메게 하고 행군을 시켜 봐야 돼.(당시엔 김일성, 김정일 모두 살아 있었음. 김일성은 1994년 7월 8일에 사망.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사망) 그래야 힘들어서 전쟁할 생각을 못할 텐데. 에고, 벌써 출발이네. 가 보자~


선두에서 꼬리로 위치가 바뀌니까 정말 정신 못 차리겠다. 야, 좀 천천히 가~. 앞뒤 간격을 맞추라고 하는데, 이건 걷는 게 아니고 뛰는 거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땅이 흔들리지? 다리가 풀렸나? 퉁! 어, 미안해. 내가 잠깐 졸았나 봐. 정말 우스워. 내 생전에 눈 뜨고 걸으면서 조는 경험을 하다니. 몸이 지치니까 머리까지 비어버린 것 같아. 정신 차려야지. 앞으로 한 시간 남았어. 저기 보이잖아, 훈련소 불 빛이! 검게 일직선으로 뻗은 담장과 진입로도 보이고 말이지. 그래,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돼. 힘내라 힘!


"힘내라 힘 힘내라 힘 젖 먹던 힘까지

싸워라 싸 싸워라 싸 싸워서 이겨라~"

- 「힘내라 힘」 / 1980년 발매 / 작사&작곡 박인호, 노래 정광태 -


힘들 땐 노랠 부르면 돼. 그래, 노랠 하는 거야!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 (중략)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 「실로암」 / 1981년 발매 / 작사&작곡 신상근 목사 -

"내 가는 길 거칠어도 주님 나의 친구 되사

나를 인도해 주시네 나를 도우시네

가는 길 캄캄해도 주님 나의 빛이 되사

나를 인도해 주시네 나를 도우시네~"

- 「사랑의 주님」 / 작사 가람, 작곡 윤형주 -


정말 힘들다. 이젠 노래할 기력도 없어. 이 길은 왜 가도 가도 끝이 없는지. 불빛은 보이는데 문은 어딘지.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삼만리~"

-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 주제곡」 / 1976년 발매 / 번안 박준수, 편곡 마상원, 노래 이지혜 -


"야! 거기. 눈 안 떠. 제 위치 잘 지켜.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여기서 낙오하면 안 된다. 알았나?"


대답할 기력도 없지만 잠을 몰아내기 위해서라도 소리를 내야 해. 어느새 동쪽 하늘이 물들기 시작했어. 그래, 이제 보인다. 문이 보인다. 조금만 더 가자. 이제 다 왔어. 봐! 위병소가 보이잖아. 만세!


위병소를 지난 지가 언젠데 우리 연대 막사가 안보일까? 이 길은 사격장 가는 길이 맞는데. 그땐 이렇게 길지 않았는데 그 새 우회도로가 생겼나? 이쪽 막사에 있는 녀석들은 좋겠다. 쥐 죽은 듯 잘만 자네. 나도 얼른 잠을 잤으면 좋겠다. 으...음.


어휴 깜짝이야. 그새 졸았나 봐. 여기서 자면 안 돼. 그러면 지는 거야. 이겨야 돼. 이겨야 돼. 허벅지를 꼬집자, 꼬집어. 뺨을 때려. 더 세게. 더 더. 한번 더! 안 되겠어, 너무 힘들어. 발이 안 움직여. 중심이 안 잡혀. 땅은 또 왜 이리 흔들리는 거야. 이놈의 총 갖다 버렸으면 좋겠다. 왜 이렇게 흘러내리는 거야! 소리라도 크게 지르면 속이 다 시원하겠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씨. 애를 써도 잠은 달아나지 않고, 희망고문이라도 하는 듯 막사는 나타나지 않고. 주님 도와주세요!


잠깐만. 어디서 많이 본 곳인데. 그래, 우리 연대야! 저 모퉁이만 돌면 우리 연대야. 야호 야야호! 왔다, 왔어. 해냈다. 잠이 달아난다. 우린 해낸 거야.


기쁨도 잠시. 저거 앰뷸런스 아냐? 지금 내리는 쟤들은 뭐야? 낙오병! 다행히 우리 소대에는 없지만, 그래도 책임은 모두가 같이 지는 것. 어김없이 들려오는 중대장의 목소리.


"개XX들. 너희는 강아지들이야(순화한 표현임). 말로 해선 안 돼.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다 퍼져요. 다 와서. 정신이 썩었어."


쉴 새 없는 욕설 속에서 어깨동무를 한 채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우리가 뭘 잘못했어, 뭘 잘못했냐고? 힘드니까 퍼지는 거지. 자기들은 하이바 하나만 쓰고 다니면서.


그런데 뒤풀이로 한 따까리(?)를 끝내고 나니까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거 있지. 아항! 우리 다리를 풀어주려고 일부러 앉아 일어서를 시킨 거로군. 우리 중대장이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인데, 말하는 것만 고치면.


샤워를 하고 나서, 침상에 누웠어. 아침에 자는 것도 색다른 맛이군. 밤을 잊은 그대여, 잘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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