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군번 훈련병의 일기(9.운명의 가스실)

Episode 9: 문제는 화생방이야

by 행복상상

(14) 공산주의는 지겨워


훈련도 막바지에 이르렀어.

정말 힘든 시간들이 지나고, 이제 이념교육, 다시 말하면 실내에서 이론 교육만 받으면 되니까 살맛 나게 생겼지 뭐야.


이 교육이 시작된 건 모 대학의 기막히게 동그라미를 잘 그리는 교수님 한 분이, 반공교육이 잘못되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 용공세력들이 활동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는, 이 반공교육을 지공(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해서래.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그런데 교육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그 아저씨가 끝내주게 그리는 동그라미만 생각나는 거 있지. 모두 그 아저씨처럼 누가 누가 동그라미를 젤 잘 그리는지 내기하기 바빴어.


교관은 배가 엄청 불거져 나온 경상도 보리문둥이 정훈 장교하고, 서울 뺀질이 출신의 장교가 번갈아가며 하는데, 내용이 내용인 만큼 진지하게 경청을 할 수밖에 없지.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수 백 명이, 그것도 오뉴월에 난방(?) 장치가 완비된 강당 안에서 진지한 자세로 경청을 하다 보니, 교관이 질문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자동으로 끄덕이며 동조하는 세력이 많아졌다는 점이야. 때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의아해하기도 해야 하는데, 전부 옳소 옳소 해대니까 문제가 된 거지.


조교들이랑 내무반장들이 이름을 적어서 벌점을 매기기도 하고, 얼차려를 시키기도 하고, 별의별 수단을 다 써봤지만, 천근만근이나 되는 눈꺼풀의 중력을 이길 장사는 세상에 없지. 그나마 주어진 주제를 스스로 정리해 볼 수 있게 만들어진 5분 스피치 시간에만 정신이 온전히 돌아올 뿐이었어. 정리한 내용을 보지 않고 외워서 5분 동안 발표를 해야 하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머릿속이 하얘져서 말짱 꽝이 되거든.


암튼, 이념교육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어. 연이은 실내교육에 졸음과 사투를 벌이던 우리는 공산주의를 정말 싫어하게 되었으니까. 1968년 10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살해당했던 이용복 어린이가 "공산당은 싫어요."라고 외쳤다던데, 우리는 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어.


"공산주의는 지겨워~"



(15) 고추 먹고 맴맴


따따따 단~ 베토벤의 교향곡 같이 '운명'의 날이 밝았어.

오늘은 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정마~알 하기 싫은 화생방 훈련이 예정된 날이야. 가스실에 들어가야 하는 거야. 알겠어? 가스실이라고!


그제 저녁에 전투화에 물광을 내고 있을 때 옆 중대 애들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걸 목격했지. 우리가 어디 갔다 왔기에 몰골이 그러냐고 물어봤어. 그랬더니 애처롭다는 듯이 우릴 보며, "너희도 가스실 한 번 들어갔다 와 봐. 재수가 좋아서 비라도 오면 피할 수 있겠지만." 이러는 거야.


지금 시점에 그때를 돌아보며 글을 쓰자니, 트럼프 대통령이 첫 번째 대선에 나서면서 구호로 이렇게 외쳤던 문구가 생각났어.


"It's the economy, Stupid!" (멍청아 문제는 경제야)

"It's the NBC(Nuclear, Biological and Chemical weapons), Stupid!" (멍청아 문제는 화생방이야)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ㅡ 옆 중대 애들의 말 중에 마지막 문장에 꽂힌 우리는, 그 뒤로 매일같이 기우제를 지내며 비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으니. 하나님 아빠! 나 어쩌면 좋아요? 네?


오전 학과 출장. 화생방 예비 훈련.

방독면 착용에서부터, 피부 제독키트와 피복 제독키트 사용법, 오염지대 통과 요령, 환자 처치 요령, 화학/생물학 작용제 노출 시의 증상에 대한 강의, 원폭 투하 시의 행동 요령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내용을 교육받았어.


오후 학과에선 방독면을 쓰고 구보 및 구르기(?)를 했어. 한낮의 더위 속에서, 고무로 만들어진 방독면을 쓰고, 거기에 정화통까지 닫아 완전 밀폐된 상태에서 굴러 봐. 숨이 차고 더운 건 둘째이고, 시력이 안 좋아서 안경을 착용하는 내가, 안경도 못 쓰고 김이 서려 뿌옇게 된 방독면의 흠집 난 창으로 내다보려니 제대로 보일리가 있겠어? 선착순을 돌리면 꼴찌는 따놓은 당상이지. 아이고, 내 팔자야!


이리저리 구르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덧 가스실 입실 시간이 다가왔어. 두세 번째 정도에 들어가는 게 장땡이라는 말을 듣고 너도나도 앞에 서겠다고 난리 부르스를 춘 덕에, 밀리고 밀려서 나는 그만 네 번째 조에 편성됐어. 운도 지지리 없지. 먼저 들어갔던 애들은 나와서 쉬고 있는데, 갸들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애간장을 태우는 이 내 심정! 긴장을 풀어준다며 굴리기는 또 왜 그리 굴리는지.


드디어 방독면 착용. 앞사람 어깨에 손을 얹고 줄줄이 입장. 한쪽 구석에선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완벽하게 화생방 피복으로 온몸을 휘감고 긴 장대를 짚고 서있는 선임하사가 저승사자로 보이는 순간, 방독면을 벗기는 무자비한 손들.


우아아악!


아고아고, 눈 따가워. 에취! 코도 맵고 목도 아파. 정말 맵다. 눈물, 콧물, 침, 땀. 얼굴 쪽에서 열려있는 곳마다 체액이 분비되고, 이것들이 뒤범벅이 되도록 구르고 또 굴렀어.


그동안 한쪽에서 우릴 보며 즐기고 있는 저 인간들! 으, 저것도 사람이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지만, 그러면 다시 한번 더 들어와야 하고, 더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야 하니 참아야 돼! 근데 얼마나 더 있어야 하냐고. 아이고 죽겠다. 옆 녀석들을 슬쩍 봤더니 모두들 잘만 버티는 거야. 한 녀석이라도 뛰쳐나가면 따라 나가려 맘먹고 있었는데. 아고 주님~ 살려 주이소!


이건 또 뭐야. '어머님 은혜'를 부르라고? 씨, 숨이 콱콱 막히는데 니들이라면 노래가 나오겠니?


"나실...제 게...에로음 웩웩 다 이즈시... 켁켁 고오오..."


엉엉엉, 노래고 뭐고 나 안 해. 아고아고 엉엉 켁켁 우웩. 근데, 뭐시라? 노래가 맘에 안 든다고 '멋진 사나이' 한 곡을 더 하라네. 엄마~ 에고 아부지~.


정신없이 분비물을 쏟고 있을 때, 저 쪽 끝에서 문이 열리며 광명이 비치기 시작했어. 빛이다, 살았다, 살았어! 우르르르.


아아아아아아아~. 감사합니다! 숨을 쉴 수 있다는 게 이리도 좋을 수가. 맑은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앞으로 공기를 오염시키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 또 그런 녀석들은 가만 두지 않겠습니다. 단, 저기 담배 피우는 동기들은 빼고요. 잘못하다간 맞을지 모르거든요. 지금은 애들이 제정신이 아니걸랑요. 이해하시죠? 좌우간 살았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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