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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Nov 23. 2019

나를 믿는다는 것

나는 자라 내가 되었고, 나이 들어 또한 내가 될 것이다.

한국을 감동시킨 혼잣말


젊은 펜싱 선수가 올림픽에서 혼잣말로 국민에게 감동을 준 적이 있다.

결승전 도중, '나는 할 수 있다'라고 홀로 읊조리는 모습이 화면에 잡힌 것이다. 실제로 그 선수는 남자 에페 개인전 결승에서 상대를 꺾고 1점 차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세계랭킹 21위의 젊은 검객이 랭킹 3위 헝가리 선수를, 그것도 대역전극으로 이긴 그 상황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자기 확신의 영향이 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금메달을 따지 못했더라도 그 선수의 혼잣말은 여전히 감동적이었을 것이나, 결과 그 자체가 자신을 믿어 의심치 않는 한 선수 내면의 힘을 증명해낸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자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즉, 믿으면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음으로써 증명하는데, 이는 '강한 믿음'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절대적이면서도 모호한 존재일 것이다. 거울을 보면 내가 있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때가 많다. 나의 영혼이나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나라고 믿었던 특성들이 보기 좋게 바뀌기도 한다.


그러니, 나를 믿으려면 웬만한 믿음으론 안된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자신을 너무도 확실하게 믿은 사람의 이야기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의 똑똑함과 냉철함, 그리고 지식이 그에겐 믿음이었다. 더불어 점점 더 커지는 그의 자기 확신적 열정은,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내달리게 했다. 그러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죽어나갔으며, 결국 그 또한 건강을 잃고 죽음을 맞이한다.

결국, 메피스토펠레스와의 영혼 거래에도 구원을 받은 그였지만, 스스로를 너무 믿어 벌어진 일들을 돌이켜보면 자신을 어느 정도까지 믿어야 할까 혼란해지기까지 한다.


즉, 나를 믿기 위해서는 큰 믿음이 필요하지만, 그 믿음이 또 너무 크면 자만의 나락이나 나르시시즘으로 곡해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믿는다는 것


살아가면서 나를 믿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 정도를 가늠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걸 나는 깨닫는다.

부족해도 안되고, 넘쳐서도 안 되는 지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삶의 정수.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다짐하려 할 때 아래 세 가지를 떠올린다.


첫째, 기준을 나로 둘 것


'비교는 행복을 앗아가는 도둑'이란 말이 있다.

여기서 '행복'을 '자존감'이나 '자기 확신'으로 바꾸어도 꼭 들어맞는다. 나를 기준으로 하지 않은 비교는 나 스스로를 요동하게 한다. 하지만, 기준을 '나'로 두고 하는 비교는 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열등감에 사로 잡히느냐, 남과 비교하여 더 발전할 것을 찾느냐는 기준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갈리는 것이다.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에는 그동안 우리가 평균의 오류에 빠져 있음을 일깨운다.

평균이 이상적인 것이며, 개개인은 오류라는 그동안의 사고방식을 여지없이 깨부순다. 평균소득 이상이면 행복하고, 그 이하면 불행할까? 평균 키보다 크면 우월하고 작으면 열등한 것인가? '평균'이라는 잣대를 들이미는 순간, 기준은 내가 아닌 평균이 되고 나에 대한 믿음은 사라진다.


기준을 '나'로 두라는 말은 이기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주체가 되어 문제를 바라보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좀 더 주도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둘째, 원칙을 가지되 융통성을 발휘할 것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 말을 정말로 갈릴레이가 했을까라는 설왕설래가 많다.

어찌 되었건 종교재판을 받고 나온 갈릴레이의 이 말엔, 자신의 믿음과 원칙을 강력하게 견지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하지만, 난 갈릴레이가 원칙을 꺾었다거나 스스로의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내가 추구하던 나와는 다른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에게 실망하곤 하는데, 대부분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그 원칙은 단기적일 수도, 보다 장기적일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위해 밤 7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와 '나는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 것이다'란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몸이 아파 약을 먹어야 하는데 7시 이후라고 먹지 않거나, 내 삶을 포기하거나 자신도 돌보지 못하면서 남을 도우려는 것을 두고 우리는 '원칙'을 지킨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고 스스로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일일까.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얻어가니 원칙에 대한 생각도 바뀐다.

원칙은 꼿꼿하게 서서 부러지지 않겠다, 물러서지 않겠다가 아니라 원칙에 따라 물러나거나 돌아가야 할 때를 아는 것. 때로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원칙을 잠시 접어두어야 하는 때도 있다는 것.


원칙을 가진 융통성은, 결과적으로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을 지킬 수 있는 큰 힘이 된다.


셋째, 남을 돌아볼 것


나를 믿는다는 자기 확신은, '나'의 행복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기 확신이 '고집'과 '아집'으로 변질되면 신호가 오는데, 대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다. 내가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굴거나, 다른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니, 혹여라도 사람들과의 갈등이 생기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혹시라도 나에 대한 믿음이 적지는 않은지, 반대로 너무 넘쳐나지는 않는지.


그래서 나는 자주 스스로를 반성한다.

나의 열정이 과하여 다른 사람의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달리진 않았나. 그것이 결국엔 잘못된 열정으로 불타오른 것은 아니었나. 또는 누군가의 자만에 나 스스로를 애써 구기고 쪼그라든 건 아닐까.


남에게 미안하고, 나에게 미안한 일들은 삶에서 반복되지만 그러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믿는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나를 믿는다는 것.

쉽지 않다. 하지만 중요하다. 누가 대신해줄 수 없다. 그리고 숨 쉬는 내내 해야 한다. 때론, 의심이 들더라도. 내가 나 자신을 버리고 싶을 때라도.

내가 웃으면 세상은 함께 웃고, 내가 울면 나 혼자 울게 되는 게 인생이다. 우는 나의 곁에 있는 건 결국 나이며, 세상과 이별할 때도 끝까지 곁에 있는 건 나 자신이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실제의 자신이 아닌 모습은 과대평가하면서, 실제의 자신은 과소평가한다.

-말콤 포브스-


나는 자라 내가 되었고, 나이 들어 또한 내가 될 것이다.

그러니 고개를 들고 걷고, 실제의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나를 믿으면서. 믿어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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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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