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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10. 2020

'글쓰기'가 대세가 된 이유

내 안과 바깥을 모두 살필 수 있는 마음과 관점

시대가 바뀌었다


말 그대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예전엔 ‘독서를 많이 해라’라는 말만 존재했는데, 요즘은 ‘글을 쓰고, 책을 쓰자’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출판업계 분들을 만나면 도서 시장은 책 읽는 사람이 줄어 불황이라는데, 분명 내 주위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넘쳐 난다. 그래서 실제로 블로그와 SNS 등에 자신의 생각과 글을 내어놓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나는 한 사람이라도 더 글쓰기를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쓰기 강의를 한다. 글쓰기와 전혀 관련이 없던 내가, 꾸준함과는 거리가 영 멀었던 내가 글을 쓰고 있으니 그 경험을 공유하고 곧바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그래서 나는 강의에 와준 분들께 묻는다.


“왜 글쓰기가 이렇게 대세가 되었을까요?”
“왜 여러분들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 여기에 와 있는 걸까요?”


이 물음에 선뜻 대답하는 분들을 나는 보지 못했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왜’보다는 ‘어떻게’의 물음표를 가지고 강의를 들으러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왜’보다는 ‘어떻게’에 매몰되는 경향이 짙다. ‘빨리빨리’라는 집단 무의식은 ‘왜’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어떻게’ 빨리 쓰고, ‘어떻게’ 책을 내는지가 주요 관심사다.


내 질문은 이제 막 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숨을 고르자고 하는 말과 같다. 

열심히 뛰는 건 좋지만, 왜 뛰는지를 알아야 결승점으로 달려갈 수 있다. 죽도록 뛰다가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열심히 뛰었는데 결승점이 반대인 경우를 우리는 꽤 많이 맞이하지 않았는가? 모두 ‘왜’라는 본질적인 물음이 빠진 뜀박질이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 속, ‘글쓰기’


나는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선한 영향력을 나누기 위해 그리고 ‘나’를 인식하고 찾기 위해 글을 쓴다. 

글쓰기가 힘들 때마다 이것들을 떠올린다. 그러면 어느새 모니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써 내려가

는 나를 발견한다. 즉,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목적’과 ‘방향’을 이야기한다. 무언가가 멈췄을 때 나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건 ‘어떻게’가 아니라 ‘왜’에 대한 고찰이다.


이러한 내면적 목소리는 차차 풀어갈 것이고, 그보다 먼저 시대적 흐름을 봤으면 한다. 

개인은 시대를 구성하는 존재이므로, 반대로 시대의 흐름을 보면 나의 마음과 행동을 돌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왜 ‘글쓰기’는 이 시대의 대세가 되었을까? 

이것을 알아야 스스로를 객관적, 주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 이로 인해 긴 호흡의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목소리를 무시한 채 무조건 내달리지 않도록.


첫째, 글쓰기는 사람의 본능이다


‘적자생존 =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다. 

글쓰기가 사람의 본능임은 역사가 증명한다. 고대의 동굴 그림과 문자부터 각 국가의 역사서까지… 사람은 ‘기록’하고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본능이 있다. 저 멀리의 역사까지 갈 필요도 없다. 우리가 어느 유명한 식당에 갔는데, 이제 막 음식이 나왔다고 생각해보자. 당장 젓가락이나 포크를 갖다 댈까?

아니다!


우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나는 오늘 소고기를 먹어서 기분이가 좋다’라고 ‘갬성’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SNS에 피드를 올려 전달하고 공유한다. 즉, 앞서 말한 ‘기록 → 표현 → 전달’의 흐름을 따른다. 긴 역사를 한 방에 

설명해주는 예다. 사람의 본능은 다르지 않다.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인문학적이고 본질적으로 그 본능을 바라봐야 한다. 그렇다면 왜 기록하고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걸까, 사람은.


그 뒤엔 ‘인정 욕구’가 숨어 있다. 

끝내 전달한 무언가가 사람들로 하여금 좋아요를 누르게 하거나, 부러움을 사거나, 그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길 바라는 마음이 그 핵심이다.


글쓰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내 생각이나 감정을 기록하고, 그것을 표현하며 전달하려는 이유는 인정받고자 하는 본능과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다.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책을 한 권 내고 싶다는 마음의 본질을 여기에 대입해봐도 좋다. 단언컨대, 여기서 벗어나는 경우를 나는 보지 못했다.


글쓰기의 시작에 나는 무엇을 기록하고 표현하고 전달하려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이것이 명확할수록 그 본능은 길게 이어질 것이다.


둘째, 콘텐츠의 시대다


바야흐로 백 세 시대다. 

직장 길게 다녀봤자 60세. 남은 40년은 일해 온 시간보다 길다. 그렇다면 이 긴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러한 불안감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건물주가 되려 한다. 또는 유튜브를 통해 콘텐츠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물려받지 않는 이상 건물주가 되긴 힘든 시대가 되었고, 콘텐츠 소재도 쉽게 찾아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본업을 내팽개치고 당장 유튜브를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본주의 시대. 

진정한 부자는 누구일까? 나는 ‘생산 수단’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 믿는다. 빵 100만 개 가진 사람보다는 빵공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부자다. ‘글’은 내가 생산해낸 생산물이고, 나는 글을 생산해내는 ‘생산 수단’이라고 생각하면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콘텐츠’가 곧 돈이 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 콘텐츠는 본업 이후 제2의 인생을 위한 것이다. 당장 본업을 때려치우고 성공할 콘텐

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차근차근 시작해 나가는 게 좋다. 글쓰기는 본업을 유지하는 감당 가능한 도전이고, 부담 없이 점점 내 콘텐츠를 강화해나갈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다. 

유튜브도 장비가 좋고 영상 편집력만 좋다고 성공할 수 없다. 콘텐츠의 질이 중요한데, 그 콘텐츠를 기획하는 것은 결국 생각과 글이다. 글쓰기는 나 자신을 돌아보는 내적 자아실현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제2의 인생을 차근차근 준비할 수 있는 자기 계발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셋째, 고(高) 퀄리티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있다


‘라떼는 말이야.’

나 어렸을 그땐, 인터넷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정보가 부족해 난리였다. 직접 경험하거나, 누구를 찾아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그득했다. 지금은 오히려 정보가 너무 많아서 문제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내 글쓰기 강의를 들으러 오시는 분들을 생각해보자. ‘글 잘 쓰는 법’에 대한 정보는 여기저기에 널리고 널렸다. 그럼에도 굳이 시간과 돈을 투자해 강의를 듣는 이유는 뭘까?


정보는 많지만, 어떤 정보가 나에게 필요한지를 선택한 것. 

즉, ‘남는 소비’를 하는 것이다. 내 콘텐츠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자격을 갖추면, 아무리 정보의 홍수라 해도 콘텐츠가 팔리는 시대다. 그러니까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이러한 수요에 부응하며 선택받을 수 있다.


넷째, 인문학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인문학의 광풍이 불었을 때, 역시나 우리는 ‘왜’가 아닌 ‘어떻게’에 집중했다. 

어떻게 하면 인문학을 빨리 공부하고 습득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누군가는 고전을 읽어야 하고, 또 누군가는 미술이나 음악 그리고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고전이나 미술, 음악 등의 예술은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부산물이다. 그 파편들을 하나하나 모아 인간을 탐구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 파편 자체를 공부하고 교양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인간’임을 상기할 때 인문학은 좀 더 쉬워진다.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므로 ‘나’에 대해 알아간다면 그리고 ‘남’을 이해해간다면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왜 행복을 추구하고 언제 행복을 느끼는가?’

‘저 사람은 왜 저럴까?’

‘나는 저 사람이 왜 싫고, 저 사람은 나를 왜 싫어할까?’.

‘왜?’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지면 그 과정에서 진정한 인문학을 만날 수 있다.


문명의 이기로 인해 우리는 좀 더 편해졌을까?

많은 기계와 앱이 생겨나 삶에 도움을 준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더 바빠졌고 더더욱 정신 없어졌다. 인문학 광풍은 그 삶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 가던 사람의 생존 본능에서 발현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글쓰기의 본질적 주제다. 아날로그로 회귀할 수 없음에도 그것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는 우리를 보면 본질에 얼마나 목말라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섯째,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


만약 내가 10년 전에 글을 쓰고 책을 냈다면 어땠을까? 

내 책은 팔렸을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만 해도 유명한 사람이나, 대학 교수 정도는 되어야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다는 정서가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책들이 고리타분하게 여겨질 정도다. 보통 사람이 쓴 글이라도, 새로운 경험과 흥미로운 시각을 제시하면 그 글이 팔리고 읽히는 시대다.


더불어, ‘작가’란 개념도 많이 바뀌었다. 

전업 작가만을 ‘작가’라 부르던 시대에서 이제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당장 SNS를 열어보자. 스스로를 ‘작가’라 칭하는 사람들이 무수하다. 책 한 권 내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양상에 ‘브런치’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일정의 심사를 통해 글을 쓸 자격이 주어진 사람에게 브런치는 ‘작가’란 타이틀을 부여한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 ‘블로거’인데, 브런치에 글을 쓰면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타이틀이 심상치 않다. 예전 같으면 네가 무슨 작가냐고 했겠지만, ‘브런치 작가’라고 하면 인정하는 모양새다. 과연, 놀라운 변화다.




자, 글쓰기는 왜 이렇게 대세가 되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어 할까? 


웬만한 답은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안에 들어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벗어나는 이유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시대와 나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왜’를 찾는 여정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떻게’를 먼저 추구하고 그것에 매몰되는 순간 글쓰기는 이어

지지 않는다. 

‘왜’를 찾고 나서 ‘어떻게’를 알게 되어도 늦지 않다. 오히려, 더 긴 호흡의 글쓰기가 가능해진다. 이것만큼은 내 말을 꼭 믿었으면 한다. 글쓰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던 평범한 내가 글쓰기를 이어온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내 안과 바깥을 모두 살필 수 있는 마음과 관점. 

그 관점의 변화는 곧 글로 표현될 것이고,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써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이 대세와 트렌드는 결코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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