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있어 준다는 건

기꺼이 같이 넘어지는 것

by 채송화

고양이가 치매 걸린 리트리버를 온몸으로 받쳐 주는 걸 봤다.

비틀거리는 개 옆에서 떠나지 않고 붙잡아 주다가 같이 안고 자빠지며 뒹굴었다.

고양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벌떡 일어났다. 개 옆을 떠나지 않았다.

옆에 있어 준다는 건 그런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2인3각 게임이 아니다.

두 사람이 한 다리를 '억지로 묶어', '어쩔 수 없이' 세 다리로 걷는 경기가 아니다.

옆에 있어 준다는 건,

'기꺼이' 같이 넘어지는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옆에 있어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이 알츠하이머병 판정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정보를 수집하기 바빴다.

왜 이렇게 됐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딱 부러진 답은 없었다. 치매 발생 원인은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 정확히 밝혀진 것도 없다고 한다. 다만 지금까지 연구결과는 유전적 요인과 생활습관으로 인한 신체저하 관련정도다.

당연히 살아온 날을 되짚어 보게 된다.

남편은 술도 담배도 안 한다. 몸에 나쁜 습관은 없는 사람이다. 나름대로 남편 치매 원인을 따져보니 유전적 요소가 가장 컸다. 시아버지, 큰누나 모두 치매다. 심지어 남편은 총각 때 치매 아버지 돌봄을 7년이나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은 청각장애가 있다. 치매에 치명적인 두 요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노인의 고립과 소외의 첫 번째 원인이 청력손실에 있다는 다큐를 보았다. 실제로 노인끼리 서로 안 들리다 보니 동문서답하다가 답답해서 자리를 떴다. 노인뿐 아니라 인간한테 소통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랬다. 지치기 시작한 건, 처음의 열정과 달리 점점 남편과 소통이 어려워지면서부터다.

귀가 잘 안 들리는 남편한테 큰 소리로 말하는 것도 힘든데,

거기다 몇 번이고 이해까지 시켜가며 말을 하자니 몇 배 더 힘이 들었다.


나야말로, 결혼이라는 제도에 억지로 묶인 2인3각의 현장에 있는 것 같았다.

줄을 풀고 싶었다. 나는 아마 평생 고양이처럼은 못할 것 같다.

함께 끌어안고 자빠지고 나뒹굴고 할 각오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각오의 결과가 비참할지라도 개의치 않을 수 있어야 하는 걸까.

스무 살 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일본의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가

지금은 무섭게 다가왔다.


종교적 구도에 가까운 고행과 수행의

그의 삶이 나로서는 거부감이 들었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사방으로 다니며 아픈 사람 돌보고 송사에 휘말리는 사람 돕고

자신은 현미 네 홉만으로 버티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며 생을 마감하더라도

죽고 나서 세상에 알려지는

그런 거룩함.


말 그대로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칠순 기념으로 자녀들이 쌍꺼풀 수술을 해줬다며 웃던 분이다.

웃음 끝에, 사십 년 결혼생활을 끝냈다고.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더 나이 든 분이 자기도 이혼했다며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냥 위로가 되더라고 했다.

그 위로는 문자 그대로 옆자리에 앉은 '장소'로서의 위로가 아닐 것이다.

이혼 선배의,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고스란히 딸려온 인생 '공간'의 무게를 짐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경험하지 않아도 보편적 아픔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고양이처럼, 미야자와 겐지처럼은 안 될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젊은 시절 선호했던 문학적 과장과 나이 든 후 돌봄이라는 현실적 간극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럼에도 여전히 남편 옆에 있는 것은,

오로지 나 한 사람이라는 사실.

그것은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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