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에 쌓이는 눈

시를 기억하라:메멘토 포에마(memento poeama)

by 채송화

어릴 때, 가수 민해경의 서기 2000년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서기 2000년이 오면 우주도 가고 전쟁도 없는, 희망과 기대에 부푼 미래를 상상한 노래다.

2000년은 너무나 멀어서 그야말로 이천 년 후에나 올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2000년 하고도 25년이 더 붙었다.

어마어마하게 오래 산 것 같지만, 백세시대 겨우 반 지나고 있다.


남편이 시를 외운 지는 2023년부터다.

미래 시대에 왔는데 남편은 과거를 잃어가고 있다.

기억을 잃어가는 남편이 시를 기억하려 애쓰고 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간다는.

윤동주 시, <길>을 외운다.

마치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남편의 처지를 시로 쓴 것 같다.


김수영 시, <생활>은 남편의 치매로 망연자실했던 나한테 하는 말 같았다.

생활은 모든 것을 제압하지만, 그럼에도 애정처럼 솟아오르는 웃음거리를 찾으라는 위로였다.

윤석구 시, <늙어가는 길>은 걸어온 길보다 남은 생의 짧음과 아름답게 나이 듦에 관해 노래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처음 가는 길. 두리번거리는 미지의 세계.

우리의 현실과도 같았다.

그런 길, 그런 생활을 남편과 동행하고 있다.


남편은 읽고, 쓰고, 외우느라 온 힘을 쏟고 있다.

영화 <메멘토>에서 주인공 레너드 셀비는 몸에 문신까지 새겨가며 기억에 사활을 건다.


치매와 시라는, 남편과 공통점이 있는 소재의 영화가 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주인공 미자는 아프다. 하지만 어디가 아픈지 모른다.

어깨가 아파서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정작 치매라는 진단을 내린다. 미자는 치료가 필요한 존재다.

치료가 필요한 미자는 그러나 병원대신 시 창작 교실에 다닌다.

감독은 왜 ‘시’라는 처방전을 권유하는 것일까?


기억은 생존의 문제다.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기억을 잃은 스페인 시인을 살았다고 볼 수 있는지 묻는다.

그만큼 기억은 곧 존재 자체라 할 수 있다.

치료책은 사실 철학사에서 내려오는 윤리적 비유이다. 스피노자 또한 『지성개선론』 을 비롯해 『윤리학』에 이르기까지 줄곧 치료책을 말하고 있다.

치료책을 찾는 것, 이 전제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전제다.


공기가 늘 함께 할 때 누구나 공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듯이, 기억도 그렇다.

기억을 잃어봐야 기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갑자기 생각이 안 날 때 얼마나 답답한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그 배우 이름이 뭐더라, 그 노래 제목이 뭐였더라. 입에서 맴도는데 뭐지 뭐지 말이 안 나오는 경우.

잠깐 기억이 안나도 답답한데, 치매는 늘 머리에 안개가 낀 듯 살아야 하다니.

겪어 본 적 없는 사람은 짐작도 못 할 일이다.


남편을 보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나간다는 말이 실감 난다.

금붕어 만도 못한 기억력이다.

그런 사람이 시를 외운다.


냇물에 내리는 눈처럼.

물에 닿자마자 녹아 버릴지라도.

밤새 내린 눈이 물을 얼리고 기어이 그 위에 쌓이듯이.

몸에 문신을 새기듯이 몸에 시를 새긴다.

남편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남편의 치료책은 시를 기억하는 것이다.

시를 기억하라: 메멘토 포에마(Memento Po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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