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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뒤에 찾아오는 작은 기쁨과 즐거움, 신의 위로일까

- 내가 나를 위로하기, 응원하고 칭찬하기. 박노해 '너의 때가 온다'

by 가을에 내리는 눈

프랑스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떻게, 참으로 신기하게도 예전에는 우리들의 사랑에, 슬픔 뒤에 그때마다 다시 큰 기쁨이 찾아왔을까?' 그만큼 그 두 사람의 사랑이 크고 강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위기와 슬픔과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으리라. 그렇게 결국은 새로운 기쁨과 즐거움이 그 둘을 찾아온 것이리라. 참아낸 것의 결과다 그러니 종국에는!


육체적 고통 혹은 정신적 고뇌가 그 위세를 보일 때, 그래서 "아 이렇게는 더는 못 살겠다!" 싶은 바로 그때에 묘하게도 아주 작은 기쁨이나 즐거움이 나를 찾아온다. 살짝살짝 불어오는 한여름밤의 미풍이라고나 할까? 나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 "아 조금은 낫군!"


숙소의 소음이 그랬고 나의 장의 문제가 그랬고 갑자기 더욱 암울하게 느껴지던 나의 내일이 그랬다. 아마 적응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몸과 정신은 무서울 만큼 탄력적이다. 금새 새로운 상황에 '적응'이라는 것을 한다. 어느 순간 그것들이 '새로운 기준 (norm)'이 된다. 무섭다!


상대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조금 전까지의 힘듦이 참으로 강했기에 그것과 비교해서 아주 조금만 그 강도가 낮아져도 내게는 큰 개선으로 느껴진다. 두 번째는 그사이 나의 기대치가 많이 낮아졌다. 그래서 이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그런 작은 달콤함 ('small sweets')에도 쉽게 마음이 간다. 인간의 간사함일지 뛰어난 적응력일지, 아니면 생존의 본능일지?


어찌 보면 신의 혹은 섭리의 작은 위로일 수도 있다. 측은지심에 따른 그들의 배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이 강제적으로 '나의 기대 수준 낮추기'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렇게라도 찍어 누르고 그래서 여전히 과도한 이 존재의 기대치와 바람과 욕망을 한참은 더 낮추려고. 당연 그들의 이런 시도는 성공한다. 성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나는 생존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는 나의 삶에서 이런저런 고통과 고뇌가 더는 심하게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새삼 개과천선 새로운 사람이 될 것도 아니고, 작금의 내 욕구와 욕심의 수준 또한 이만하면 많이 줄어들었다, 충분히 작아진 상태다 그리 진단하기 때문이다. '아직 멀었다'고 그들이 판단한다면 부디 그들은 다른 수단을 택하기를 감히 그들에게 권한다. 이런 고루한, 상투적인 수법 말고!


'위로',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의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그 슬픔을 달래주는 것 이렇게 설명한다. 성경 욥기 중에서 욥은 자신을 위로하겠다고 멀리서 찾아온 '친구' 세 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끔찍한 위로자들 (miserable consolers)'이라고.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친구라고 보지 않는다. 오죽하면 그 선하고 평생 의로움 속에 너그럽게 살아온 욥이 그런 표현을 쓰겠나? 처음 7일 밤낮을 아무 말없이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있었던 그 행동, 그나마 그것이 가장 위로에 가까운 그들의 행동이었다. 그 다음의 모든 것은 욥의 고난과 고통, 한 방에 무너짐을 고소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이용해 그를 평생 처음으로 '마음껏' 조롱하고 무시하고 욕보이는 것 그것이었다. 그들은 애초 위로하러 온 자들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열등감과 그 오랜 세월 속의 실질적 열위와 질투심을 만회해 보려 온 것이다. 그들은 실지로 그런 행동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마도 두 번 다시 욥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기한 것이다. 달랑 한 장 남아있던 그 티켓을 그렇게 어리석게 써버린 것이다.


"내 친구 조아핑의 마음도 위로가 필요해서 따라왔을 뿐이예요.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니까요. 믿고 기다려주는 게 그 어떤 위로보다 더 소중해요." 늘 친절한 티니핑이 하는 말이다. 이것이 위로다. 진정한 위로란 이런 것이다.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다. 기껏 위로차 왔다고 하면서도 이리 말한다. "그런데 혹 네가 뭔가 잘못한 것 아니야? 그 사람이 그냥 그럴 사람은 아닌데? 아이, 네가 잘못했구먼! 왜 그랬어, 좀 참지!" 나도 다 안다. 그때 내가 조금 참고 달리 말하고 다르게 행동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것을. 나도 알아. 그런데 지금 내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가르치러 온 것은 아니잖아? 나는 지금 그냥 위로가 필요해. '괜찮다고, 애썼다고, 많이 힘들었겠다고. 내가 옆에 있다고. 늘 그렇게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그러니 힘내라고' 이리 말해줄 사람이 나는 필요한 것이다.


이제 시를 본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시다. 이보다 더 나를, 우리네 인간들을 응원하는 시가 또 있을까? 그 믿음이, 그 당당한 격려가, 그 후한 평가가 고맙다. 힘이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래서 굳이 여기 이렇게 옮겨 적는다. 이런 기분 좋은 칭찬, 얼마만인가? 칭찬이 고래만 춤추게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 든 자도, 슬픔 속에 갖힌 사람도, 그저 지금 그의 앞이 캄캄하기만 한 그런 사람도 충분히 춤추게 할 수 있다.


자세히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그런 작은 존재 솔씨, 그것보다는 조금 큰 도토리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당장의 그 작은 존재를 보지 않는다, 이 시인은! 그들의 내일을 본다. 금강송과 우람한 참나무를. 보리 한 줌이 가져올 저 푸른 보리밭을 그는 보고 있다. 바람에 자연스럽게, 여유롭게 미소와 풍요 속에 흔들리는 그 푸른 물결을 본다. 지금 당신이 작다고? 누가 그래요? 아니요, 커요 충분히 커요. 혹 지금 당장은 아니라면 조금만 더 있으면 모두가 깜짝 놀랄 그런 모습일걸요? 사람들이 모를 뿐이지요, 당신조차도 모르고 있군요? 아니요, 내 말 믿으세요, 당신은 이미 충분히 크고 바로 저기 저 앞에 '당신의 때'가 오고 있어요. 눈 크게 뜨고 한 번 보세요!


너의 때가 온다

-박노해

너는 작은 솔씨 하나지만

네 안에는 아름드리 금강송이 들어있다


너는 작은 도토리알이지만

네 안에는 우람한 참나무가 들어있다


너는 작은 보리 한 줌이지만

네 안에는 푸른 보리밭이 숨 쉬고 있다


너는 지금 작지만

너는 이미 크다


너는 지금 모르지만

너의 때가 오고 있다


신의 위로와 함께 이렇게 우리네 사람의 위로가 오면 좋겠다. 그들의 응원이 있으면 좋겠다. 그 따스함 속에 다시 일어설 힘과 용기가 생길 것 같다. 아들 녀석 어릴 때 내가 자주 해주던 말이 있다. "아빠는 그 옛날 힘들 때면 늘 이런 그림을 머릿속에 가득 그렸단다. '저 앞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바로 저 앞에 황금빛 보리밭이 넓게 펼쳐져있다'고.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어서 오라고,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고 내게 말하는!" 그때도 나의 고마운 아들은 이 아버지를 응원해 주었다, 힘껏!


# 지난날 내가 참으로 힘들고 외로웠을 때 처음 만난 나를 늘 힘껏 응원해 주고 위로해 준 나의 고마운 젊은 동무에게 이 아침 이 글을 보냅니다. 지금은 아마도 한참 자고 있을 새벽의 시간인데. 곤히 잘 잤으면 좋겠네요. 여기 먼 곳에 당신의 동무가 있어요. 늘 당신을 응원합니다, 잊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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