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현재

한강 『소년이 온다』를 읽고

by 건강한 오후


나는 한동안 광주를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 무지는 무관심이 아니라, 닿을 수 없었던 거리의 이름이었다. 1980년 5월,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내가 살던 진주의 일상은 평온했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체육대회 준비가 한창이었고, 친구들과는 라면 값을 내기하며 짤짤이를 했다. 그러나 라디오에서는 하루에도 여러 번 '계엄령 확대'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어른들은 식탁에서 그 말을 피해 밥숟가락질만 빠르게 움직였다. 우리는 저 먼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어른들의 얼굴에 묻은 침묵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보이지 않는 파문처럼 교실 안까지 번져 왔다.


일상의 수면 아래로 흉흉한 소문이 스며든 것은 며칠 뒤였다. 진주의 D고등학교 스쿨버스가 광주에 갔다가 불타 전소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어제까지 우리 곁을 지나다니던 익숙한 버스가 이웃 도시에서 뼈대만 남은 채 타버렸다는 사실은 어린 내게 공포의 실체를 부여했다. 어른들은 그곳의 일을 나지막이 '폭동'이라 불렀다. 그 단어는 불온하고 무시무시한 괴물 같았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광주에 대해 묻지 않았고,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공을 차면서도 어른들의 눈치를 살폈다. '불타버린 버스'와 '폭동'이 결합했을 때, 광주는 생명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거대한 화염의 구덩이였다. 나는 질문하지 않기로 했다. 침묵으로 그 시절을 통과하며 많은 것을 잊었다고 믿었다.


1986년 대학에 입학했다. 86학번. 그 시절 캠퍼스에는 비밀이 없었다. 1980년의 진실은 누군가 나에게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거기에 있었다. 벽보에 붙은 유인물, 선배들이 건네는 얇은 책자, 과방에서 돌려보는 사진들. 광주는 캠퍼스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마치 공기처럼. 신입생 환영회가 끝난 어느 날, 선배가 물었다. "광주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980년, 내가 중학교 1학년이었던 해 진주까지 흘러들었던 그 먼 소문. 그러나 6년이 지난 1986년의 캠퍼스에서 광주는 더 이상 소문이 아니었다. 선배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를 휘감은 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부끄러움도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1980년 5월, 광주의 형과 누나들이 죽어갈 때 나는 교실에서 라면 값을 걸고 짤짤이를 하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이라는 나이는 아무것도 모를 나이였지만, 동시에 알아야 했던 나이이기도 했다. 그 6년의 빚을 갚겠다는 듯, 1987년 6월 나는 최루탄 연기 속을 달렸다. 그때 나는 비로소 1980년의 빚을 갚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1995년 회사에 들어가면서 나는 다시 침묵을 배웠다.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에서 인사팀장이 말했다. "회사는 가족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1987년 6월의 어깨동무를 떠올렸다. 최루탄 연기 속에서 우리가 외치던 '민주'와 '해방'이라는 단어들. 그러나 회사라는 가족은 달랐다. 거기에는 위계가 있었고, 침묵이 있었고, 효율이 있었다.


처음에는 저항했다. 부당한 지시에 "이건 아닙니다"라고 말했고, 회의에서 다른 의견을 냈다. 그러나 조직은 강했다. 나를 향한 선배들의 시선이 차가워졌고, 인사고과에 빨간 줄이 그어졌다. 나는 배웠다. 조직에서 살아남으려면 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묻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을.


10년이 지나 과장이 되었을 때, 나는 신입사원 시절의 나를 만났다. 회의 중 한 신입이 질문을 던졌다. "이 프로젝트, 윤리적으로 문제 있지 않습니까?"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자네, 회의 끝나고 내 방으로 와." 그날 오후, 나는 그 신입에게 조직의 논리를 설명했다. "이상과 현실은 달라. 먹고살아야지." 그의 눈빛이 식어가는 것을 보았다. 1987년 거리를 달렸던 86학번 청년의 눈빛이 식어가듯이.


20년이 지나 상무가 되었다. 25년의 직장 생활 끝에 도달한 그 완장. 명함에 찍힌 '상무(常務)' 두 글자가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은퇴를 앞둔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가 마침내 도달한 '상무(常務)'라는 완장은, 1980년 광주에서 소년들이 누웠던 '상무관(尙武館)'과 같은 발음이었다는 것을. 하나는 일상의 생존을 위한 얇은 완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가 폭력에 짓밟힌 영혼들이 서로를 증언하던 통곡의 장소였다.


은퇴 후 고요한 시간 속에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펼쳤다. 소년 동호가 짓이겨진 친구의 시신을 찾아 도청 '상무관'으로 들어서는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숨이 멎었다. 상무관. 25년의 직장 생활 끝에 내가 도달한 것은 '상무(常務)'였다. 일상의 업무를 관리하는 자리. 그러나 소설 속 '상무관(尙武館)'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짓이겨진 소년들이 나란히 누워 있던, 인간의 존엄이 마지막으로 숨 쉬던 거대한 무덤이었다. 같은 발음, 다른 한자. 하나는 생존의 완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증언이었다. 나는 책을 덮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1980년 5월, 상무관의 소년이 친구의 시신을 닦아주고 있을 때 나는 진주 교실에서 짤짤이를 하고 있었다. 1987년 6월, 나는 최루탄 연기 속을 달리며 그 빚을 갚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95년부터 2020년까지, '상무'라는 완장에 도달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상무관'을 외면해 왔는가.


2021년 어느 날, 진주로 돌아와 D고등학교 앞을 지나다 멈춰 섰다. 41년 전, 이곳의 스쿨버스가 광주에서 불타 전소되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공포에 떨었다. '폭동'이라는 단어와 '불타버린 버스'가 결합하며, 광주는 생명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화염의 구덩이가 되었다. 주말이면 그 버스는 전세버스로 쓰였다고 했다. 광주로 간 그날도 그랬을 것이다. 학생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빌려 타고 갔을 버스. 그들은 무사히 돌아왔을까. 광주에서 무엇을 목격했을까. 나는 41년 동안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중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회사원일 때도. 질문하지 않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상무'가 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질문을 삼켜왔던가.


자전거를 멈추고 땀을 닦으며 바라본 남강의 물결 위로, 1980년의 화염과 2009년 어머니를 보내던 화장장의 불길이 겹쳐 흐른다. 강물 위로 부서지는 노을 속에서, 나는 오래전 소년의 얼굴을 본다. 그는 여전히 맑은 눈으로 나의 현재를 묻고 있다. 1980년 5월, 상무관의 소년이 친구의 시신을 닦아주고 있을 때 나는 교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2020년까지, '상무'라는 완장을 향해 달려가며 나는 얼마나 많은 소년들을 외면했는가. 대답할 수 없다. 다만 이제는 외면하지 않겠다고, 그 작은 약속만을 남긴다. 소년은 아직도 오고 있다. 제목이 현재형인 것은 그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 1980년부터, 1987년에도, 2020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이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외면했던 어린 날의 침묵과 조직의 그늘 아래 숨겨두었던 부끄러움을 기록하며. 기억한다는 것, 그것은 소년의 질문에 답하는 우리의 유일한 윤리이자, 소년이 온전히 우리 곁에 도착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글을 쓰고 나서

한강의 책은 늘 독이다. 네 권을 읽었고, 뼈에 새겼다. 읽고 나면 몰매 맞은 듯한 고통이 육신을 짓누른다. 피와 무쇠의 무게. 평론가의 말이 희미하다. '채식주의자'의 불문판은 칼날이 덜 날카롭다고 했던가. 번역은 언어의 칼집인가, 칼날의 훼손인가. 알 수 없다. 침묵이 단단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