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등대로』를 읽고
총성은 없었으나, 시간은 십 년 넘게 내 몸을 감쌌던 코트 소매의 마지막 실밥을 잔인하게 끊어냈다. 소매는 어깨선에서 힘없이 툭 떨어져 내렸다. 가볍지만 공허했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십 년이라는 거대한 시간이 얼마나 가느다란 실 한 가닥에 매달려 있었는지를.
그 코트를 처음 샀던 겨울이 떠올랐다. 퇴근길 백화점 지하 매장에서, 세일표를 붙이던 젊은 점원이 내게 말했었다. "이건 오래갑니다." 그 말은 그날의 나에게 필요했던 위로였다. 그때부터 십 년 동안 나는 그 코트를 그렇게 걸쳤다. 폭설이 쌓인 출근길에도, 사표를 품고 나섰던 마지막 겨울 새벽에도 그 코트는 내 어깨를 덮고 있었다. 어깨에 남은 그 무게가 오늘에서야 떨어져 나간 것이다.
코트에서 낡은 가죽 냄새가 풍겼다. 내가 뚫고 지나갔던 수많은 공기들이 거기 배어 있었다. 겨울 새벽 지하주차장의 냉기, 엘리베이터 안에서 스치던 누군가의 향수, 회의실 천장에서 쏟아지던 에어컨의 마른 바람. 코트는 그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기억하고 있었는가. 십 년이 지나도록 이 코트를 걸치고 그 냉기 속을 누볐던 그 남자가 진짜 나였는가.
소매가 떨어진 코트를 들고 나는 한참 서 있었다.
코트를 벗어 던졌다. 책상 위 서랍을 열었다.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서랍이었다. 낡은 수첩이 나왔다. 페이지마다 이름이 빼곡했다.
수첩의 종이 냄새엔 습기가 배어 있었다. 회의 자리에서 건네받았던 인사들의 이름들. 각자의 웃음과 악수, 그리고 나를 스쳐간 짧은 호명들. 그런 이름들이 이 작은 책 안에서 한 겹 한 겹 겹쳐 있었다. 그 위에 내 이름 한 줄이 적혀 있었다. 강○○.
찾았다. 손끝이 그 이름 위에 머물렀다.
낯설었다. 그러나 손에 익었다. 25년 동안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연습하던 서명이었다. 그 이름은 나를 가두는 틀이었으나, 동시에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벽이기도 했다. 나는 그 무게에 기대어 쓰러지지 않았다. 이제 와 그를 모르는 척하는 것은, 내 생의 절반을 지운 뒤 나머지 절반만으로 살겠다는 비겁함일지도 몰랐다.
그가 나였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수첩 아래에 만년필이 있었다. 수십 년을 써온 탓에 몸통이 닳아 있었다. 검은 플라스틱 표면에 음각된 희미한 이니셜. 손끝으로 더듬었다. 까칠한 감촉이 손가락 끝을 통해 전해졌다. G. J. Kang
이 이니셜을 새긴 것은 입사 이듬해 봄이었다. 첫 월급으로 산 만년필이었다. 그때 나는 이 이름으로 언젠가 무언가를 쓰겠다고 생각했다. 보고서가 아닌 것을. 결재판이 아닌 것을. 그 다짐이 얼마나 오래 서랍 안에 잠들어 있었는지, 나는 그날까지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뚜껑을 열었다. 딸깍. 잉크통을 꺼냈다. 만년필 끝을 담갔다. 잉크를 빨아올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잠시 가만히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한 인간의 죽음을 괄호 속에 처리했다. "(램지 부인이 죽었다. 상당히 갑작스럽게.)" 세상의 서사는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의 생이 끝났다는 사실은 괄호 안에 조용히 봉인된 채, 시간은 그냥 흘러간다. 나는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숨이 막혔다. 25년이 괄호 속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퇴직 서류에 마지막 서명을 하던 날, 서명이 종이를 떠나는 순간 무언가가 함께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들렸다. 괄호가 닫히는 소리였다.
송별식이 끝나고 문을 나서던 날이었다. 세상은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혼자 엘리베이터를 탔다.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혔다.
그 침묵이 지금 이 방 안에도 있었다. 만년필을 손에 쥔 채, 나는 그 침묵과 다시 마주했다. 그때의 나는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나는 백지를 펼쳤다.
잉크가 종이에 닿았다. 만년필 끝에서 잉크 한 방울이 맺혔다가 종이 위에 내려앉았다. 번졌다. 끊길 듯 이어지는 검은 선이 천천히 퍼져나갔다.
나는 첫 문장을 썼다.
G. J. Kang
손이 떨렸다. 잉크가 종이 속으로 배어들었다. 서두르지 않고 바라보았다.
이름 아래 오늘 날짜를 적었다. 누구의 결재도 필요하지 않았다.
종이 위에 남겨진 이름은 낯설었다. 직함이라는 괄호를 떼어내고 나니, 이름은 생각보다 작았다. 서랍 속 이름은 조용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방이 꺼진 방 안에서 공기가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백지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괄호는 열렸다. 이 모름이, 오랜만에 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