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셀의 좌표

W.G. 제발트 『아우스터리츠』를 읽고

by 건강한 오후

2010년 겨울, 밤 10시가 넘은 사무실. 나는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사무실은 적막했고, 들리는 것은 형광등의 낮은 윙윙거림뿐이었다. 컴퓨터 화면에는 엑셀 파일이 열려 있고, 팀원들의 이름이 세로로 나열되어 있다. 인사팀에서 보낸 메일 제목: "구조조정 예비 명단 작성".


마우스를 쥔 손에 땀이 났다. 손바닥이 미끄러워 마우스 패드에 손자국이 남았다. 첫 번째 이름 옆 하얀 셀을 더블클릭했다. 커서가 깜빡인다. 숫자 1을 입력한다. 엔터. 두 번째 셀로 커서가 이동한다. 창밖으로 야간 경비원이 순찰 도는 소리가 들렸다. 딸깍, 딸깍, 손전등 불빛이 유리창을 스쳤다.


세 번째 이름. 네 번째 이름. 손가락이 멈췄다. 내 후배의 이름이 보인다. 함께 일한 지 3년. 그의 책상에는 아들 사진이 붙어 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찍은 사진. 나는 그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의 이름 옆 셀에 마우스를 가져간다. 존재가 숫자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엔터. 파일 저장. 상단 업로드. "전송" 버튼 위에서 커서가 멈췄다. 책상 위에는 식은 커피가 놓여 있었다. 검은 액체 표면에 형광등 불빛이 일렁였다. 나는 클릭했다. 메일 전송.


모든 게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1995년 입사한 이래 15년 동안 나는 이 회사에서 대리, 과장을 거쳐 팀장이 되었다. 그리고 2010년 겨울, 나는 명단을 제출하는 팀장이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오전 10시, 복도 모퉁이에서 그 후배와 마주쳤다. 그는 한 손에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팀장님, 어제 야근하셨어요? 불 켜져 있던데." 내 목구멍이 메었다. 어제 내가 그의 이름 옆에 숫자를 입력했다는 사실이 서류철과 그의 웃는 얼굴 사이 어딘가에서 삐걱거리고 있었다.


"응, 좀."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쳤다. 뒤에서 그의 발소리가 멀어진다. 딸깍, 딸깍. 복도 끝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 내 얼굴이 형광등 불빛 아래 창백했다. 수도꼭지를 틀어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었다. 물이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거울 속 얼굴은 여전히 낯설었다.


이틀 후 본부에서 최종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의 이름이 있었다. 그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았다. 한참을 말이 없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나는 팀장이었고, 조직의 결정이었으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사무실을 떠올릴 때마다 그 책상 앞에 앉아 있다. 형광등 불빛, 컴퓨터 화면의 차가운 빛, 엑셀 파일의 하얀 셀. 트라우마는 흐르는 시간을 거부하고, 응고된 공간 속에 현존한다.


독일 작가 W.G.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는 억압된 트라우마를 차분하고 냉철한 문장으로 기록하는 소설이다. 주인공 자크 아우스터리츠는 평생 기차역, 요새 같은 거대한 구조물을 집착적으로 연구한다. 그의 건축 연구는 학문이 아니었다. 부재한 삶을 찾는 행위였다. 트라우마의 좌표를 추적하는 순례였다. 제발트는 말한다. 트라우마는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구조물 속에 갇힌 채 응고되어 있다고.


나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다. 2010년 겨울 그 사무실은, 아우스터리츠에게 리버풀 역이 그랬던 것처럼, 내 트라우마가 응고된 좌표다. 나는 팀장이었고, 명단을 작성해 제출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1995년 신입사원으로 들어와 15년 동안 조직 속에서 살아남았고, 그 대가로 나는 팀원들의 이름 옆에 숫자를 매기는 권한을 얻었다. 엑셀 파일의 하얀 셀은 아우스터리츠가 응시했던 역의 차가운 벽처럼, 아무런 감정도 없이 나의 무력함을 기록했다.


대량 해고의 현대적 효율성 속에서, 존재는 숫자가 되고, 고통은 데이터가 되었다.


나는 2020년 회사를 떠났다. 25년을 근무하고 명예퇴직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사무실에 다시 가보지 못했다. 회사를 떠난 지 5년이 지났지만, 그 건물 앞을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돌렸다. 아우스터리츠가 리버풀 역을 피했듯이, 나도 그 사무실을 피했다. 그러나 피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공간은 여전히 나를 기다린다. 응고된 채로.


2024년 가을 어느 날, 나는 그 건물 앞에 섰다. 15년 만이었다. 건물 외벽은 리모델링되어 유리가 깨끗했다. 1층 로비에는 다른 회사 간판이 걸려 있었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예순 살 내 얼굴을 보았다. 흰머리, 처진 어깨, 배낭을 멘 등산복 차림.


유리 너머 2층 어딘가에, 45살의 내가 아직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엑셀 파일 앞에서, 커서를 깜빡이며, 손에 땀을 쥐고. 창밖으로 야간 경비원의 손전등 불빛을 보며. 책상 위 식은 커피를 보며.


15년 전 그날 밤, 나는 선택할 수 없었다. 명단을 제출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한 채 화면만 바라봤다. 나는 팀장이라는 책임 뒤에 숨어, 결국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할 뿐이었다. 나는 가해자도, 희생자도 아니었다. 단지 숫자를 입력하는 손일뿐이었다. 그러나 그 손이 내 정체성의 좌표가 되었다.


나는 건물을 등지고 돌아섰다. 트라우마는 시간을 거부한다. 공간 속에만 현존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공간 밖으로 걸어 나왔다. 15년이 걸렸다.


60대가 된 지금, 나는 안다. 진정한 정체성은 우리가 외면하고 억압했던 것까지 끌어안는 데서 온다는 것을. 아우스터리츠가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은, 트라우마와의 화해가 아니라 그 영원한 무게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나 역시 2010년 겨울 그 사무실에서 선택할 수 없었던 그 무력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제발트는 소설 곳곳에 출처를 밝히지 않은 흑백 사진들을 삽입한다. 사진은 '그곳에 있었음'만을 증명할 뿐, 그때 느꼈던 감정은 증명하지 못한다. 나에게도 그런 사진이 있을까. 2010년 겨울 그 사무실을 찍은 사진은 없다. 다만 내 기억 속에 그 공간은 흑백 사진처럼 선명하다. 책상, 컴퓨터, 형광등. 감정은 지워지고 공간만 남았다.


이제 나는 그 공간을 기록한다. 그것이 치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억압된 과거를 끌어안는 것, 그것이 나이 듦의 의미라면, 나는 이제 그 공간을 직시할 준비가 되었다.


억압된 과거야말로 현재 나의 좌표를 결정하는 가장 정직한 공간이다. 그것이 나이 듦이 내게 가르친 유일한 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