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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삼계탕이 준 선물

닭다리와 삶의 법칙

by 감성반점

누구나 지워지지 않는,
'인생 네 컷' 같은 기억이 있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
'눈물의 미아보호소 상봉 사건'과 함께,
거의 유일한 ‘수업의 기억’ 이 그렇다.

모든 걸 끓여버릴 듯
푹푹 찌던 어느 해 '복날'.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엄마의 새벽 수고인 맛난 도시락을
게눈 감추듯 삼켜내고,
포만감에 늘어진 몸을 의자에 걸친 채,
더위를 견디고 있었다.

전동샤터 같은 눈꺼풀이 내려지기 직전,
5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키 크고 잘생긴 상업 선생님께서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점심 직후의 5교시.
식곤증에 무더위까지 기승을 부리니
교실 안 공기마저 집중을 방해하며
모두를 반쯤 쳐지게 만들었고,

특히나
선생님은 유독 지쳐 보였다.
물론,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지만.

복날이라서, 선생님께서는 다른 몇몇과
이른 점심으로 삼계탕과 닭죽을 드셨고,
기분 좋은 나른함을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잔으로 가만히 즐기고 있는 순간,

스르르 열리는 교무실 문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선생님의 지인.

순간, 아뿔싸~
며칠 전 지인과의 점심 약속을
그제야 떠올리신 거다.
심지어 메뉴가 삼계탕이었다는 것도.

멀리서 온 지인에게
“이미 먹었다”라고 말할 순 없어서,
억지 미소를 달고
한 번 더 삼계탕집으로 향하셨단다.

그 모든 일이
오늘 수업을 위한 운명이었을까?

선생님은 숨을 깊게 내쉬고
수업 주제였던 ‘효용체감의 법칙’을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반복되면 감흥이 줄어드는 법"

첫 그릇은 쫄깃하고 고소했지만,
두 번째 그릇은, 껌을 십듯 질기고,
국물은 진한 한약 같았다며
직접 겪은 '맛의 변화'를
법칙에 빗대어 설명하셨다.

그 비유는 너무도 생생했고,
'그 법칙'은 내 안에 깊게 각인되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선생님의 두 번째 삼계탕 속
그 닭은, 환생이 있다면 몇 번은 했을 시간이다.

그런데 왜일까.
먹지도 않은 삼계탕의 영양분이 아직도
내 마음 근육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살면서 나는 자주 이 법칙을 마주한다.
‘효용의 체감’은 삶의 여러 장면에서
적용되는 또 하나의 진실 같다.

반복되는 충고와 위로,
연속 방문한 단골집의 맛,
기념일마다 받는 꽃다발 등…

안타깝지만 무뎌지는 감흥.

반면,
반복되는 이별의 상처,
혼자만 떨어지는 내 주식의 청개구리 근성,
헌혈바늘의 공포처럼
여전히 낯설지만 익숙해지는 것도 있다.

비유들이 적절하든, 궁색하든
내게 있어 '그 법칙'은
인생의 또 다른 선생님이다.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에서 건진
“모순 속에서도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는
삶의 메시지가,
감동이란 여운으로 남아있지만,

'삶의 철학'은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고
두 번째 삼계탕 속에도,
은근히 끓고 있던 게 아닐까.

일상에 녹아있는 인생법칙들.
또 어딘가에서 발견하길 바라며,

오늘도
두 번째 닭의, 더 나은 환생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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