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그게 2021년이야?"
오랜만에 가로수길에서 만난 동기 선생님이랑 시간이 참 빠르다는 걸 실감했다. (편의상 이하 '여름샘'이라고 부르겠다) 요가지도자 과정에서 우리는 만났다. 신기하게도 과정을 듣는 동안에는 여름샘과 친하지 않았다. 과정이 끝나고서야 우리는 대화를 하고, 식사를 하고, 종종 보고싶을 때 본다.
이번에도 문득 그녀가 생각이 났을 때 쯤, 연락이 왔다.
기쁜 마음으로 잡은 약속은,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는 그녀가 나에게 내어준 귀한 점심시간이었다.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입이 닳도록 이야기를 많이 할까봐 1시간이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1시간 20분이나 된다고 했다 할렐루야.
매번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인데, "지난번에 아기 때문에 커피빈에서 샌드위치 사준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라면서 신사역에 있는 조용한 분위기의 맛있는 파스타집에서 파스타를 사줬다. 다음엔 내가 산다고 하니 "언니가 사줄게 언니가 돈벌잖아~" 하면서 어깨동무를 했다.
요즘 하는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워홀 간다더니 언제 가? 등등.
지극히 평범한 대화를 나누다가 여름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놀랐다.
"나 올리비아가 비전보드 발표했을 때 아직도 종종 떠올라.
그때 옷장 속에 해골이 있었고 거기서 나오고 싶다고 했잖아.
지금도 종종 떠오르면 마음으로 응원하는데,
올리비아가 거기서 나온 거 같아."
비전보드는 지도자과정 중 선생님께서 '여러분이 원하는 삶을 잡지에서 이미지를 수집해서 그려보세요' 라는 과제였다. 선생님은 경험담을 바탕으로, 비전보드가 단순 작업같지만 정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준다고 하셨다. 내 보드에는 해골이 남겨진 옷장, 파운데이션 브러시, 노랑색 캐리어, 그리고 보드의 끝에 바다를 바라보는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발표를 해야했을 때, '울지말자' 다짐하며 나갔지만 실패했다.
"옷장 속에 해골은 힘든 저예요.
저는 이 과정을 듣기 전에 너무 쉼없이 달려서 힘들었어요. 영혼이 메마른 것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제는 그 힘든 영혼을 보내주고 이 큼지막한 파운데이션 브러쉬로 훌훌 털어버리고, 여행하듯이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마음을 기록하고 일상을 기록하면서 그렇게 살다가. 동생이랑 바닷가에 우리가 원하는 모습의 마을을 짓고 살고 싶어요"
나를 바라보는 동기들의 눈에는 측은지심 어린 마음과 응원하는 마음이 어려있었다. 사실 이 과정을 듣는 모두가 한 번 이상은 눈물을 흘려서, 내가 눈물을 흘리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서도, 여기 와서 참 여러번 운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도 잊고 있던 비전보드 이야기가 나온 것도 신기한데 보드를 처음 보여준 순간부터 떠오를 때마다 응원하고 있었고, 지금은 네가 그 옷장에서 나온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수십권의 잡지에서 찾아 오려붙인 종이 쪼가리들은 아주 슬프고 초라한 것만 같았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 삶의 궤적은 내가 그렸던 그림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비전보드 속 이제 막 캐리어를 싸고 있는 단계라니. 내가 용기가 생겼다는 사실이 참 감사하고 열심히 싸워준 내가 감사했다.
그냥 종이가 아니었다.
내가 그린대로 나는 흘러가고 있었다.